2014. 3. 9. 19:52ㆍ성인들 가르침/금강경
무한진인의 금강경 이야기(37)
제17분 구경무아분(3)
<또한 수보리야, 그 까닭은 아뇩다라삼보리를 일으킬 어떤 한 법도 있지 않기 때문이다. >
앞 문장에서 처음에는 보살이 아뇩삼먁삼보리를 얻기 위하여 커다란 대승적 발심을 품고 보시행과 수행을 열심히 하며 마침내 이원적인 상대세계를 벗어나서 비이원적인 절대본체에 들어가면, 이 절대본성의 상태에서는 어떠한 상대성이 없으므로, 아무 대상(法)도 없고, 깨달았다는 주체인 나도 없으며, 깨달았다는 어떤 증표도 없다고 했읍니다. 얻은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때는 개인적인 "나라는 생각"(我相)를 비롯하여, 사람이라는 생각(人相), 살아있는 생명체라는 생각(衆生相), 영원히 살아있는 영혼이 있다는 생각(壽者相) 등, 이러한 "내가 있다"는 존재성의 상(相)들이 모두 절멸된다고 했읍니다.
<또한 수보리야, 그 까닭은 아뇩다라삼보리를 일으킬 어떤 한 법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문장은 주객 이원화 현상세계를 완전히 무시하고 오직 비이원화 절대세계에 잠겨 있는 절대바탕(空)상태 입장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위도 없는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을 얻었다고 할만한 어떤 상(相,法)도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깨닫기 이전인 이원화 현상세계에 있을 때는
깨달음이라는 목표가 있고 아뇩삼먁삼보리를 얻어야 겠다는 생각의 목표가 있었읍니다.
그러나 막상 최종 목표에 도달해 보니, 그 주객이원화시절에 목표로 했던 아뇩삼먁삼보리라는 최고의 무상정등각의 증표라는 것이 없고,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주체인 "나"도 사라지고, 모든 대상과 관념들이 사라졌기 때문에 깨달았다는 어떤 관념적인 상(相)도 일체 없어졌다는 것이죠.
아뇩삼먁삼보심을 발할 만한 대상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실은 원래부터 자기가 아뇩삼먁삼보리 자체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별도로 아뇩삼먁삼보리라고 할만한 것(法)이 없다는 것입니다.
눈이 어떻게 눈을 볼수가 있겠읍니까?
자기가 어떻게 자기 자신을 볼수가 있겠읍니까?
여기서 법(法)이라는 것은 대상적인 어떤 상(相)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깨달았다는 어떤 증표나 체험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깨달은 후에도 무엇인가 남아 있다면 그 남아 있는 것은 자기가 아니고 타자(他者)일 뿐입니다.
자기가 아뇩삼먁삼보리 자체인데, 어떻게 아뇩삼먁삼보리를 일으킬 수 있는 법이나 체험이 남아 있겠읍니까? 깨달았다는 증표(찌거끼)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깨달으니 얻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것도 이원화 세계에서 만든 하나의 관념, 생각일 뿐이므로, 모든 주체와 대상, 관념들이 공(空)이 되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깨달았다는 체험이나 생각조차도 없다는 것입니다.
주객 이원화 현상세계에 있을 때는 "깨달음"이라는 환상의 목표를 가지고 보시행과 수행을 하여 열심히 추구해지만, 결국은 그런 깨달음이라는 것을 성취했다는 생각조차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와 대상(法)이 일체 사라졌기 때문에 그것을 성취했다고 여길 주체(나)와 대상이 모두 없어진 것이죠.
전체가 여여(如如)한 공(空)일 뿐, 깨달음이라는 것도 없고, 아뇩삼먁삼보리를 얻었다는 생각도 없고, 일체가 텅 비어서 아무 생각도 없읍니다.
비로소 아무 것도 아닌 상태인 된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옛날 시골 초가집 부얶 아궁이에서 불을 땔 때에 아궁이 속에 불이 잘 지피도록 나무 땔깜을 뒤적이던 부지깽이 나무 막대기를 아궁이 불을 끌 때에 마지막으로 부지깽이 나무 막대기 마저 불에다 집어 넣어 다 태워버리는 것과 같읍니다.
나무 땔감을 불이 잘 타도록 뒤집어 주기도 하고 나무를 아궁이 깊은 곳으로 밀어주기도 하는 부지깽이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관념으로 비유해 본다면, 결국 아뇩삼먁삼보리라는 깨달음의 관념적 목표를 마지막 최종 깨달으면 그 깨달음의 불꽃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관념마저 전부 태워 버리는 것으로 비유 될 수가 있겠읍니다.
이렇게 계속 반복해서 부처님은 구도자들의 모든 상(相)을 없애주기기 위해서, 아뇩삼막삼보리, 깨달음이라는 마지막 남은 관념(相)조차도 타파해 주기 위해서 읽는 사람이 지루해 할 만큼 계속 반복적으로 비슷한 내용을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의미심장한 말씀을 반복적으로 듣는 중생들, 즉 이원화 세계에 젖어 있는 아직 깨닫지 못한 중생들은 위에서 부처님이 말씀하신 < 모든 중생을 구제하되 한 중생도 구제한 바가 없다>, < 아뇩삼막삼보리를 일으킬 어떤 한법도 있지 않다> 는 등, 이런 현상세계에서는 비논리적으로 들리는 말씀들을 들었을 때에 대략 어떤 반응이 올까요?
첫째 반응은 이런 말씀이 의미하는 깊은 뜻을 이해하려고 지성(知性)을 이리저리 굴려서 헤아려 보겠죠.
그러나 이런 비이원적인 입장에서 하신 말씀을 이리저리 아무리 그럴듯하게 해설을 길게 늘어놓아도 실질적으로 딱 들어맞는 말을 표현할 수는 없읍니다.
그렇다면 구도자는 금강경의 모든 문장들이 다 이러한 의미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로 되어있는데, 이런 말씀을 어떤 자세로 새겨 들어야 할까요?
사실 금강경 구절들은 지금 필자가 해설하고 있는 것처럼 해설하면 구도자들에게는 별로 도움은 안됩니다. 그저 심심풀이 삼아 말 장난하고 있는 것입니다.
금강경에 나오는 부처님의 말씀 중에 많은 문장이 절대 본체, 즉 여래(如來)상태를 직접 표현한 말씀이긴 하지만, 이원화 상대세계에 젖어 있는 중생들이 관념적으로 이해하기는 무척 어렵읍니다. 설사 이해한다고 해도 그것은 그림자를 붙잡는 것과 비슷합니다.
따라서 위에서 나온 <모든 중생을 구제해도, 한 중생도 구제한 바가 없다.> 또는 <아뇩삼먁삼보리를 일으킬만한 어떤 한법도 없다> <깨달으면 아무 것도 얻은 바가 없다>등등의 절대 깨달음 상태를 직접 표현한 말씀을 여어(如語)라고도 말합니다.
금강경에서 부처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내용은 거의 이러한 여어(如語, 비이원적인 표현) 문장으로 되어 있는데, 금강경을 공부하는 구도자는 이러한 문장을 대할 때마다 어떤 자세로 취하여 공부해야 할까요?
그 문장에서 표현하는 어떤 숨어있는 심오한 의미를 지성(知性)을 통해서 이해하려고 애써야 할까요?
그런데 이런 여어(如語)의 문장은 그 의미를 지성(知性)과 이원적인 사고구조로는 전혀 이해할 수가 없읍니다. 어떤 관념적인 상상은 할 수도 있겠죠.
또 위에서 해설했듯이 그런 상황을 대략 짐작할 수는 있을 수가 있지만, 그런 생각들은 깨달음 공부를 하는데 이원화 관념만 증가시켜서 오히려 방해만 됩니다.
금강경 속의 부처님 말씀 중 여어(如語) 문장들은 대부분 읽는 이의 사고흐름을 즉각 단절시키면서 내면을 향하게 하기 위하여 제시해 논 문장들입니다.
그럼 이렇게 사고흐름을 즉각 단절시킬 수 있는 문장을 구도자가 어떤 자세를 가지고 읽어야 그 효과를 얻을 수가 있을까요?
그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되,바로 "모름"을 유지하면서 예리하게 깨어서 내면으로 향해서 들어 가는 방법을 조심스럽게 제시해 봅니다.
예를 들면 <아뇩삼보리를 일으킬만한 어떤 한법도 없다>라는 구절에 대하여 어떤 말의 뜻을 알기 위하여 지성적인 사고작용을 돌리지 말고, <모름> 속에 그대로 멈추어서 바짝 깨어서 내면을 향해 의심(참구)으로 예리하게 주의를 기우리라는 것입니다. <모름>에 머물러 있으면 다른 생각의 파생을 정지시키며, 바짝 깨어서 모름을 기준으로 한 의심 또는 참구는 주의를 내면으로 집중시키게 할 수가 있읍니다. 모름에 머무는 것을 정(定)이라고 할 수가 있고, 전체적인 깨어있음은 혜(慧)라고 말할 수 있읍니다. 말없이 깨어있는 상태가 바로 주시하는 것입니다.
또한 의심이나 참구는 내면을 향하는 주의력을 강하게 추진할 수가 있읍니다.
그러나 이해하기 어려운 여어문장의 의미를 어떤 관념의 대상으로 자꾸 이해하고 알려고 한다면 생각들의 파생을 끊임없이 번식하게 되어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고 일어나 마음을 고요하게 안정시키지 못합니다.
그런 과정에서 무슨 심오한 의미를 깨쳤다 하드라도 모두 이원적인 생각의 쓰레기더미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모름"과 "깨어있는 참구"를 통해서 금강경 독송을 해야지 옳바로 금강경을 읽는 자세라고 할 수 있읍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모든 것을 주시하는 "내면의 주시자"로 향하는 방법입니다.
내면의 주시자가 뭡니까? 그것은 모양도 없고 어떤 대상에도 머물지 않으며, 속성도 없고 알수도 없는 것, 말없이 홀로 깨어서 지켜보는 앎이며 모든 것을 주시하고 작용시키는 주체입니다.
금강경을 오랫동안 위에서 말한 것처럼 독송하면 저절로 모든 것을 주시하는 주시자상태로 들어가게 됩니다. 주시자 자체가 되면 주시작용도 사라집니다.
그런 연후에야 '모든 것이 여여(如如)다' 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어떤 구도자가, 그것은 오직 알 수가 없는 것인데,
오히려 "내면의 주시자는 이러 이러한 것이다"라고 미리 알고 나서 "나는 이러한 내면의 주시자가 되어야 한다"라고 애쓰거나 말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구도 태도입니다.
내면의 주시자는 절대로 어떤 징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수행을 하다가 잠깐 어떤 공백기(空白期)를 체험했다고 해서 그것이 마치 주시자상태에 있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아! 내가 바로 아무 것도 없는 주시자 상태를 체험했다" 이렇게 말한다면 절대로 그 비이원적 최종상태에 들어갔다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이 최종 주시자 상태가 바로 금강경에서 말하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금강경에서 나오는 부처님의 심오한 말씀 한 구절 한 구절이 모두 비원적인 절대 본체, 즉 여래의 상태를 말씀하신 것이며, 또한 구도자들의 사고(생각)의 흐름을 즉각 단절(斷絶)시켜면서, 비이원적인 내면으로 향하도록 유도하는 말씀이라는 것을 상기해서, 위에 제시한 내용처럼 금강경 독송 수행시는 지성(知性)을 통해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직관(直觀)으로 바로 내면으로 들어간다는 자세로 금강경 독송수행을 해야 되지 않을까 하는 의견을 제시해 봅니다.
끝으로 금강경 이 문장에 대한 야부스님의 선시 한수 들어 보겠읍니다.
<홀로 앉아 있으니 소연히 방이 텅 비어
다시 남북과 동서도 없음이라.
비록 그렇게 화창한 봄날 같은 힘을 빌리지는 않았으나
복숭아꽃이 한 모양으로 온통 붉음을 어찌 하리오>
-무한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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