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2. 4. 20:36ㆍ성인들 가르침/금강경
무한진인의 금강경 이야기(34)
제16, 能淨業障分(능정업장분)
復次 須菩提 善男子 善女人 受持讀誦此經 若爲人輕賤 是人先世罪業 應墮惡道
부차 수보리 선남자 선여인 수지독송차경 약위인경천 시인선세죄업 응타악도
以今世人輕賤故 先世罪業 則爲消滅 當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이금세인경천고 선세죄업 즉위소멸 당득아누다라삼묘삼보리
須菩提 我念過去無量阿僧祗劫 於然燈佛前 得値八百四千萬億那由他諸佛 悉皆供養
수보리 아념과거무량아승지겁 어연등불전 득치팔백사천만억나유타제불 실개공양
承事 無空過者
승사 무공과자
若復有人 於後末世 能受持 讀誦此經 所得功德 於我所供養諸佛功德 百分不及一 千
약부유인 어후말세 능수지 독송차경 소득공덕 어아소공양제불공덕 백분불급일 천
萬億分 乃至算數譬喩所不能及
만억분 내지산수비유소불능급
須菩提 若善男子 善女人 於後末世 有受持 讀誦此經 所得功德 我若具說者
수보리 약선남자 선여인 어후말세 유수지 독송차경 소득공덕 아약구설자
或有人聞 心則狂亂 狐疑不信
혹유인문 심즉광란 호의불신
須菩提 當知是經義不可思議 果報亦不可思議
수보리 당지시경의불가사의 과보역불가사의
제16분. 업장을 깨끗히 맑힘.
또한 수보리야,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을 수지독송하는데 만일 다른 사람에게 모욕을 당한다면, 이 사람은 전생의 죄업으로 인해 악도에 떨어질 것인데, 금생에 모욕을 당함으로써 전생의 죄업이 소멸되고, 따라서 당연히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다.
수보리야, 내가 무량아승지겁 전의 과거를 생각해 보니, 연등부처님을 뵙기 전부터에도 팔백사천만억나유타 수의 여러 부처님를 만나 뵙고, 모두 다 공양하고 섬기어 헛되게 지내지 않았다.
만약 어떤 사람이 오는 말세에, 이 경을 수지독송하면 그 공덕은, 내가 모든 부처님을 공양한 공덕으로는 백천만억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고, 어떤 수의 비유로도 미칠 수 없다.
수보리야,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오는 말세에 이 경을 수지독송하여 얻은 공덕을, 내가 다 말한다면, 혹 어떤 사람은 마음이 몹씨 혼란스러워져서 의심하며 믿지 않을 것이다.
수보리야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경의 뜻도 가히 헤아릴 수 없으며, 또한 과보도 헤아릴 수가 없다.
이번 16분의 제목이 능정업장분(能淨業障分), 즉 업장을 깨끗히 맑게 한다는 뜻입니다. 금강경을 열심히 수지독송하면 과거부터 쌓여온 업장을 깨끗히 맑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업장이 맑아져야지 비로소 부처경지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준비가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수보리야,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을 수지독송하는데 만일 다른 사람에게 모욕을 당한다면, 이 사람은 전생의 죄업으로 인해 악도에 떨어질 것인데, 금생에 모욕을 당함으로써 전생의 죄업이 소멸되고, 따라서 당연히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다.>
금강경을 열심히 수지독송하면 나에게 복 받는 좋은 일만 생길 줄 알았는데, 오히려 어려운 일이 생기면서 남에게 경멸과 천대를 받는 일에 부딪친다면, 이것은 전생에 자기가 쌓아논 나쁜 짓으로 인해서 업보가 해소되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금강경 독송 뿐만 아니라, 다른 마음 수행공부도 하지 않는다면, 이런 사람은 자기의 과거 업보로 인해 오히려 더 큰 악보와 불행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금강경을 독송하므로써 그로 인하여 남에게 잠깐 모욕적인 대우로써 가벼운 액땜으로써 대체된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금강경 독송수행을 하면 과거의 쌓인 나쁜 업장이 깨끗하게 정화된다는 것이지요.
대개 어떤 종교의식이든, 기도수행이든, 남을 도와주는 봉사활동을 하든,다른 정신수행을 하든간에 어떤 선행(善行)을 하면 그 선행의 결과로서 좋은 선업(善業)이 있기를 누구나 바랍니다.
말하자면 기도나 보시행을 하면 좋은 일을 하는 것이므로 자기에게 돌아오는 결과인 업보(業報)도 자기에게 이롭고 좋은 결과가 당장 돌아 올 것으로 기대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눈에 보이는 좋은 결과는 안보이고, 오히려 불행과 고통을 받게 됩니다. 이런 경우에는 위의 본문과 같이 과거에 쌓아논 악한 업장(業障)들이 기도나 선행을 하므로써 해소되는 과정에서 불행과 고통을 받는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읍니다. 그러나 그러한 불행과 고통들을 직접 겪으므로써 그로인해 과거 악업으로 인한 업장이 점차로 깨끗히 정화된다는 것이죠.
수행측면에서도 어떤 지관명상수행을 하는 중에 명상을 안할 때보다도 명상을 시작하면 오히려 쓸데없는 망상,잡념들이 더 극성스럽게 올라오게 되는데, 이것이 평소에 잠재되어 있던 망상들이 드러나면서 소멸되는 과정이기 때문에 그 망상이 나오는 것을 즉시 알아차려 똑바로 깨어만 있으면 서서히 사그러질 수가 있지만, 명상자는 그 시간을 못 참고 명상을 포기하는 수가 많죠.
명상을 시작하여 마음이 고요해지면 당연히 망상의 찌꺼끼들이 잘 보이게 되는 것이고, 그것이 지나가는 망상이라고만 알아차리면서 무시하면 시간이 갈수록 망상은 저절로 사라지게 되어 있읍니다. 그러나 그 망상을 붙잡고 관심을 주면 망상이 점점 번식을 하면서 커져서 명상자를 압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명상 중에 망상이 일어나는 것은 바로 바탕에 가라앉아 있던 망상들이 해소되기 위하여 흘러가는 것이라고 이해하면 그 망상에 관심을 주지 않게 되고 그러면 나중에는 저절로 망상이 스스로 사라지게 됩니다.
업장(業障)이라는 것도 과거에 행한 행동의 결과가 제8 아뢰아 저장식에 종자로써 잠자고 있다가 어떤 인연으로 인해서 밖으로 활성화되어 나타나는 것인데, 선업으로 인해 만들어진 것은 좋은 것으로, 악업으로 인한 것은 악보(惡報)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자기가 과거에 한 행위가 잠재기억 속에 메모리되어 있다가 어떤 인연으로 인해 그 결과(업보)가 나타나는 인과(因果) 작용입니다.
이 인과업보(因果業報) 작용은 아주 과학적인 작용원리인데, 사람들은 이 인과 업보에 대해서 잘 이해를 하지 않을려고 합니다.
사실 인과업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생(前生)까지 내려 갈 필요도 없이 지금 당장 알 수가 있는 원리입니다.
오늘이 현재면, 어제는 과거 전생이고, 내일은 미래생이 되는 것이죠.
어제 남한테 기분 상하게 심한 말을 한 것이 오늘 그 상대방 한테 역으로 복수를 당하고, 그 당한 일이 분해서 또 내일은 그에게 어떻게 한번 찔러 볼까 하는 생각들이 바로 그대로 인과 업보로써 우리 마음 안에서 그대로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인과 결과가 전부 우리 의식 안에서 서로 서로 인연과 인과 작용이 작용하고 있는 현상입니다. 인연작용은 공간적인 전체관계작용이고 인과작용으로 시간적인 발생순서작용을 말합니다.
한순간에 무슨 행동을 하든 그 일체가 제8 아뢰아식에 저장되어 자기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에 인연과 인과작용을 일으키고 있읍니다.
밖의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밖의 세상이라는 것이 보편의식이 감각기관에 의하여 대상화되어 드러난 것이므로 결국은 모양과 성질들은 다양하지만 같은 하나의 보편의식인 것입니다.
그 하나의 의식 안에서 수억천만의 인과작용과 인연작용이 순시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이런 말이 있읍니다. 만일 전생을 알고자 한다면 이 생에서 받는 것이 그것이어서, 자기가 겪고 있는 일들이 바로 전생의 과보(果報)라는 것입니다. 또한 내생(來生)에 대해서 알고자 한다면 바로 현생에서 행하고 있는 것이 바로 내생의 과보가 된다는 것입니다.
즉 현생에서 지금 고통과 불행을 겪고 있다면 그것은 내가 과거생에서 쌓아논 행위의 과보를 스스로 되받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정신수행이라는 것이 바로 수억만회의 과거생에서 쌓여있던 업장(業障, 魔障)을 깨끗히 정화하는 작업이며, 과거 업장만 정화된다면 최종 절대 깨달음을 증득하는데 시간과 공간적인 작용이 끊어져 바로 즉각적인 돈오(頓悟)가 작동되는 것입니다.<금생에 모욕을 당함으로써 전생의 죄업이 소멸되고, 따라서 당연히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다.>
이 부분을 소홀하게 흘려 버릴 수가 있는데, 반드시 자기 업보를 맑게 정화시키는 수행을 하고 난 뒤에야 붇다의 보리심을 얻을 수 있다고 알려주는 내용입니다.
과거의 업보가 해소되고 현재의 업보가 깨끗이 정리되어 마장이 녹지 않으면 보리심을 계발할 수가 없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과거생의 업보가 그대로 남아 있으면 그 자체가 장애물이 되므로, 일단은 그 업보의 마장이 해소되어야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 열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수보리야, 내가 무량아승지겁 전의 과거를 생각해 보니, 연등부처님을 뵙기 전부터에도 팔백사천만억나유타 수의 여러 부처님를 만나 뵙고, 모두 다 공양하고 섬기어 헛되게 지내지 않았다.
만약 어떤 사람이 오는 말세에, 이 경을 수지독송하면 그 공덕은, 내가 모든 부처님을 공양한 공덕으로는 백천만억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고, 어떤 수의 비유로도 미칠 수 없다.
아승지(阿僧祗)라는 단어는 표현으로 말할 수 없을 정도의 무한하게 끝없는 수를 말하며, 겁(劫)이라는 단어도 도저히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무량한 시간을 말합니다. 또한 나유타(那由他)도 숫자개념으로 헤아릴 수 없는 무량한 숫자를 말합니다.
즉 부처님은 과거 연등부처님 시절 뿐만 아니라, 그 이전부터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무량한 시간 동안 헤아릴 수 없는 무한량수의 부처님들을 받들어 섬기어서 조금도 삶을 헛되게 보내지 않고 그 공덕을 무량하게 쌓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량한 세월동안 무량한 부처님들을 공양하고 받들어 모셨으니 그 공덕이 얼마나 크겠읍니까. 말하자면 부처님의 공덕이 말로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무량하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과도하게 표현한 문장입니다.
그러나 만일 오는 말세에 어떤 사람이 이 금강경을 수지독송한다면, 그가 얻은 공덕은 부처님이 무량한 세월동안 무량한 부처님들을 모시고 받들어 섬긴 그 공덕은 수천억만분의 일에도 못미칠 정도로, 더욱 더 큰 공덕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즉 이 금강경을 수지독송하는 것은 말로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큰 공덕이 있다고 표현하고 있읍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부처님이 헤아릴 수 없는 세월동안 무량한 수의 부처님들을 공양한 것이 금강경 수지독송하는 것보다 못하다고 말씀하셨을까요?
부처님이 무량한 수의 부처님을 모시고 공양한 것은 바로 부처님들의 몸을 돌본 유위적(有爲的)인 보시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무한량의 유위적인 공덕을 받겠지만, 그런 보시로서는 "나 없음"의 무위적 공덕은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금강경을 수지독송하고 "나 없음"을 깨치면 이것이야 말로 무위적(無爲的)인 공덕을 받으므로, 아무리 무한량의 유위적 공덕을 받을지라도, 금강경을 수지독송하여 받는 "나 없음"을 깨치는 무위적인 공덕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수보리야,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오는 말세에 이 경을 수지독송하여 얻은 공덕을, 내가 다 말한다면, 혹 어떤 사람은 마음이 몹씨 혼란스러워져서 의심하며 믿지 않을 것이다.
수보리야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경의 뜻도 가히 헤아릴 수 없으며, 또한 과보도 헤아릴 수가 없다.
부처님이 앞서 금강경을 수지독송하는 것이 무량한 세월동안 무량한 수의 부처님을 공양한 것보다도 천억만배나 더 큰 공덕이 있다고 말씀하신다든가, 아니면 현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는 공덕이 무한한 허공만큼 헤아릴 수가 없다고 하신다든가 등, 이렇게 말씀하시는 내용에서, 그 공덕은 무한해서 헤아릴 수가 없다, 불가사의하다,는 등의 말씀을 듣고 어떤 사람들은 어지럽고 혼란스러워서 의심만 할 뿐 믿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말할 것이 부지기수지만 그 공덕을 다 말해보아도 더욱 사람들이 믿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만큼 이 금강경이 품고 있는 의미가 불가사의하고, 그 과보 역시 생각할 수조차 없이 무량하다는 것입니다.
만일 무량한 시간동안 무량하게 나타난 모든 부처님을 다 공양하고 정성껏 모셨다 하드라도 그것은 이원화세계에 나타난 몸에 대한 유위적 보시라고 할 수 있읍니다. 유위적 보시는 여하튼 현상으로 나타난 유위적 공덕을 얻겠지만, 금강경을 수지독송하여 아상(我相)을 타파하면 "나"가 사라지므로 전체가 되어 무위적인 공덕을 얻게 되는데, 결국은 "나"가 없으므로 아무 것도 얻는 것이 없고, 또한 고금 우주전체가 나가 되므로, 영원히 "있는 그대로" 상태가 되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금강경의 불가사의한 뜻이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금강경의 공덕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참고로 금강경에서는 일반 현상계의 기본 법칙을 뛰어넘는 상식적으로는 좀 지나침 듯한 과장표현을 많이 쓰는데, 이것은 그 과장표현어를 통해서 "생각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는 그 넘어 상태"로 주의를 기우리도록 의도적으로 현상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과도표현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과장 표현이 아니라, 그 표현 그대로 읽는이들이 그런 무한의 표현을 진심으로 믿는다면, 그들의 마음의 주의를 보이지 않는 뒤퉁수 윗쪽으로 자기도 모르게 촛점이 모아지도록 하면서, 조금이라도 "불가사의하고 알수 없는 현상계 그 넘어를 향해서" 관심을 향하도록 유도하는 기막히게 의도된 표현입니다.
이렇게 헤아릴 수 없는 무량수, 항하강 모래알수 만큼, 팔만사천 나유타수 등의 표현방법은 그 읽는 사람이 사고력을 최대한 확장시키면서 또한 사고의 흐름과 번식을 끊어지게 하는 효과가 있으므로 금강경을 읽으면서 속으로 "에~이, 구라가 너무 심하셔 !"라고 무시하며 넘어가면 옳바르게 금강경을 수지독송하지 못합니다.
그 '무한하게 불가사의하다'는 말 자체가 바로 금강경의 핵심 화두이며, 가치 그 자체입니다.
어떤 비이원적 수행체계의 스승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금강경 14분에서는 "(대상에)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라고 말합니다.
또한 이16분에서는 "금강경의 뜻은 불가사의하며, 그 과보 또한 헤아릴 수가 없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들은 다 비슷 비슷한 의도를 가지고 진리를 직접적으로 표현한 여어(如語)문장들입니다.
-무한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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