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9. 5. 19:21ㆍ성인들 가르침/금강경
무한진인의 금강경 이야기(15)
第7分 無得無說(무득무설)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耶 如來有所說法耶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야 여래유소설법야
須菩提言 如我解佛所說義 無有定法 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 亦無有定法 如來可說
수보리언 여아해불소설의 무유정법 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 역무유정법 여래가설
何以故 如來所說法 皆不可取 不可說 非法 非非法
하이고 여래소설법 개불가취 불가설 비법 비비법
所以者何 一切賢聖 皆以無爲法 而有差別
소이자하 일체현성 개이무위법 이유차별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아뇩삼막보리를 얻었느냐?
여래가 설한 법이 있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제가 부처님 말씀을 이해하기로는 아뇩삼먁보리라고 할 만한 정해진 법이 없으며, 여래께서 설하셨다고 할 고정된 법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설하신 법은 다 취할 수도 없고, 말 할 수도 없으며,
법도 아니고 법 아님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까닭은 현인과 성인은 무위법으로서 차별을 두기 때문입니다.
이번 7분은 무득무설(無得無說), 얻을 것도 없고 설할 것도 없다는 내용입니다.
깨달음은 얻을 것도 없고, 진리라고 설 할만한 고정된 법이 없다는 뜻입니다.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耶 如來有所說法耶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야 여래유소설법야
須菩提言 如我解佛所說義 無有定法 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 亦無有定法 如來可說
수보리언 여아해불소설의 무유정법 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 역무유정법 여래가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아뇩삼다라삼막삼보리를 얻었느냐?
여래가 설한 법이 있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제가 부처님 말씀을 이해하기로는 아뇩삼먁보리라고 할 만한 정해진 법이 없으며, 여래께서 설하셨다고 할 고정된 법도 없습니다.
전장에서는 법에도 집착하지 말고, 법 아닌 것에도 집착하지 말며, 일체 모든 상에 끄달리지 말라고 하셨읍니다.
그래서 수보리에게 전에 이야기해 준 내용을 제대로 새기고 있는지 테스트 해 볼 겸 넌즈시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습니다.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느냐? 여래가 설한 법이 있느냐?" 고 묻습니다. 이 질문이 참으로 이상하죠.
부처님은 분명히 최고의 깨달음을 성취한 분으로 자기가 깨달은 체험을 바탕으로 수십년동안 수 많은 제자들에게 법문을 설해 주었는데, 갑자기 여래가 최고의 깨달음을 얻었느냐, 여래가 설한 법이 있느냐?고 묻는 다는 것은 무언가 수보리에게 테스트를 하는 물음 같읍니다.
그러자 수보리가 "제가 지금까지 쭉 부처님 말씀하시는 것을 지켜 보았는데, 분명히 최고의 깨달음이라고 할만한 그런 고정된 법은 없으며, 여래께서 설하셨다고 할만한 정해진 법은 없었읍니다." 이렇게 대답했는데, 수보리는 부처님이 묻는 의도를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부처님의 갑작스러운 질문에도 장단을 잘 맞추어 대답을 한 것입니다.
사실 부처님이 "여래(如來)"라는 말을 쓰셨는데, 여래(如來)는 절대본체가 된 상태이므로, 이 상태에서는 주,객의 이원화가 없고 전체가 한가지이므로 무엇을 얻었다거나 또한 누구에게 설법을 한다는 그런 일이 다 무의미한 것이죠.
여래가 어떤 정해진 특별한 상태(아뇩다라삼보리)를 얻었다면 거기에 머문다는 일이 있게 되는 것이고, 또한 무슨 정해진 설법을 했다면 머물만한 고정된 법이 있다는 것이므로, 전번에 부처님이 말씀하신 <머문바 없이 행한다>는 말씀과는 어긋난다고 볼 수가 있읍니다.
여기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말은 한문으로 무상정등정각(無相正等正覺)이며, '가장 높고 바르며 원만한 깨달음'이라는 뜻으로 쉽게 말해서 더 이상 위없는 대각(大覺), 절대진아에 도달한 상태를 말합니다.
이전에서는 부처님이 상(相)에 머물지 말고, 법에도 머물지 말고, 법 아닌 것에도 머물지 말라고 가르쳐 주었죠.
깨달음이라는 상(相), 무상정등각이라는 상(相)이 남아 있다면 아직 깨닫지 못한 상태라고 말할 수 있겠죠.
깨달음이란 아무 상(相)도 없는 것이고, 무상정등각이라는 것도 사실 이름일 뿐이지, 그 의미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뜻입니다.
여래의 아뇩삼먁삼보리심이라는 것은 비이원적인 절대 깨달음 상태인데, 주,객 이원화 상태 수준에서 말 할 수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것이므로, 알려지는 것도 없고, 말할 수 있는 어떤 상도 없는 것이죠.
어떤 사람이 공부 끝에 어떤 체험을 해서 자기가 그 체험을 증거로 "내가 드디어 깨달았다 !" 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이것은 착각한 것입니다.
자기가 깨달았다고 여기면 그것은 깨달음이 아닙니다.
무언가 이 상대세계에서 체험을 했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원화 세계의 정신적인 체험일 뿐이지, 비이원적인 깨달음은 아닙니다.
진정하게 깨달은 것은 깨달았다는 생각조차 나오지 않아야 합니다.
부처님은 항상 말이 나오기 이전, 생각이 나오기 이전의 비이원적인 상태에 대해서만 말씀하셨지만, 이원화 상태에서 듣는 범부들은 그 말의 뜻을 상(相)으로 만들어 이해하려고 하니깐, 도저히 말 이전, 생각 이전으로 되돌아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아뇩삼다라삼막삼보리를 얻었느냐?여래가 설한 법이 있느냐?" 라고 묻는 자체가 바로 말이 나오기 이전의 상태, 의식 이전상태에 대하여 이해하느냐고 넌즈시 물어 보신 것이죠.
부처님이 깨닫고 나서 수많은 설법을 하셨지만 모두가 진리로 가는 방편을 설하셨을 뿐이며, 진리 그 자체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말씀을 안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리 그 자체에 대하여 "진리는 바로 이것이다"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가 없읍니다.
만일 "이것이 진리다"라고 말하는 순간에 이미 진리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진리는 대상화 할 수도 없고 관념화 할 수도 없읍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집착을 놓아버리고 욕심을 버리고 분별을 끊으라고 말씀하셨는데, 불법을 가르쳐 주시는 방법이 진리를 새롭게 세우거나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나쁜 것, 잘못된 것을 타파하기만 하면 진리가 저절로 드러난다고 말씀하신 것이죠.
즉, 파사현정(破邪顯正)이라, 삿된 것을 파하기만 하면 그대로 옳바른 것이 저절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대부터 "진리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전부 부정하고 나서, 마지막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은 것이 바로 그것이다."라고 말했읍니다.
모든 내용물을 비우고 남은 텅 빔이 바로 그것이라는 것이죠.
하지만 절대로 "진리는 바로 이것이다"라고 말할 수는 없고, 진리가 아닌 것만 지적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깨달음으로 가는 길을 가르쳐주는 불법(佛法)이란 어떤 고정된 특정한 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또 사람들의 근기에 따라 적당하게 방편을 맞추어서 설법을 한 것이기 때문에 어떤 고정된 법이나 길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깨달음으로 가는 길은 지금 여기서 이 모든 일상사가 모두 그 길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팔만사천의 수많은 법문이 있다고 하지만, 사실 팔만사천의 방편이라고 말할 수도 있읍니다. 꼭 무슨 깊은 암자에 앉아서 좌선만 하는 것이 깨달음으로 가는 길은 아닙니다만, 그렇다고 수행을 전적으로 무시해서도 안되는 것이죠.
모든 방편과 법문은 그 나름대로 가치는 있지만, 그렇다고 꼭 내가 하는 그것만이 최고다 하는 주장이나 집착도 버려야 합니다.
부처가 설법한 법문일지라도 그것을 이해하고 나서 버려야 하는데, 그 범문에만 집착한다면 생전 거기서 벗어날 수는 없겠죠.
깨달음이란 바로 그런 기존의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읍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전장에서 법상(法相)도 집착하지 말고 법 아닌 것에도 집착하지 말라고 했읍니다.
何以故 如來所說法 皆不可取 不可說 非法 非非法
하이고 여래소설법 개불가취 불가설 비법 비비법
所以者何 一切賢聖 皆以無爲法 而有差別
소이자하 일체현성 개이무위법 이유차별
왜냐하면 여래께서 설하신 법은 다 취할 수도 없고, 말 할 수도 없으며,
법도 아니고 법 아님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까닭은 현인과 성인은 무위법으로서 차별을 두기 때문입니다.
'여래께서 설하신 법은 취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으며, 법도 아니고 법 아닌 것도 아니다' 이 말은 "여기 상대적인 이원화 세계, 말의 세계, 관념의 세계 안에서는 비이원화된 저쪽 상태에 대하여 취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다, 그것은 어떤 법이나 법 아닌 것을 초월해 있다" 라는 의미입니다.
여래가 설법을 한다지만, 이원화 세계의 언어로 말을 하는 것이므로 비이원화 상태를 이원화 개념의 언어로는 표현이 안되고 지적인 앎을 통해서는 알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또 그것은 어떤 모양이나 특성이 없으므로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러므로 모든 깨달은 성현들은 무위상태로 범부와는 차별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즉 성현들은 "나"라는 존재가 사라진 무상정등각을 깨쳤으므로 겉으로는 표시가 안나지만, 행하여도 함이 없는 자연스러운 무위상태로 행하므로 다른 범부들과는 차별이 나 보인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깨달은 사람은 "나"라는 자아의식이 사라졌으므로 무위(無爲)적인 삶을 살지만, 보통사람은 나라는 의지를 쓰므로 유위(有爲)적인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깨달은 사람은 <내가 있다는 느낌>이 없어서 무엇이든지 자연스럽게 행하지만, 깨닫지 못한 범부는 항상 <나라는 생각> 때문에 모든 행하는 것이 자기 의지로 행한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내가 있다"는 생각을 가진 깨닫지 못한 범부는 큰 바위덩어리 하나(나라는 부담)를 항상 등에 질머지고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비유할 수가 있겠읍니다.
깨달은 사람은 머물지 않으면서 행하며, 의지적인 함이 없이 행위을 합니다.
'나'라는 의지로 행위하는 것을 유위(有爲)라고 하고, '나'라는 생각이 없이 자연스럽게 행하는 것을 무위(無爲)라고 하죠.
따라서 깨달은 사람은 일체 집착도 없고, 망상번뇌도 없어서, 무슨 일을 하든 항상 함이 없이 행하므로 아무런 흔적이나 미련도 남기지 않읍니다.
아무런 업도 남기지 않고 기억도 남기지 않으며, 마치 순진한 어린아이처럼 천진 무구하게 있는 그대로 매순간 행위 할 뿐입니다.
그러나 항상 자기 흔적을 남기고,상처를 남겨서 업을 만들고, 갈등과 괴로움을 남긴다면 이것은 유위행이라고 볼 수가 있겠죠.
앞에서 나온 "머문바 없이 행한다"라는 것이 바로 무위행(無爲行)을 말합니다.
위의 원문 맨 마지막 문장에서 "성인과 현인은 무위법으로서 차별을 두기 때문이다"라는 문장에서, 구라마즙본만이 "차별을 둔다"라는 단어가 추가 되었는데, 산스크리트 원본이나 티벳본,현장본 같은 데에서는 "차별을 둔다"는 말이 없읍니다.
산스크리트 원본 번역본을 보면 " 성자들은 무위로 나타나기 때문이다"라고만 되어 있읍니다.
구라마즙본에서 "성자들은 무위로써 차별이 난다"라는 말은 성자들은 "내가 있다"는 생각이 사라졌기 때문에 보통 범부와는 달리, 있는 그대로 무위로 행한다는 것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서 구마라즙이 덧붙힌 것 같읍니다.
그러나 문장의 의미전달에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무한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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