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나 깨나 늘 한결같이 여여(如如)합니다.

2012. 9. 29. 22:10성인들 가르침/과거선사들 가르침

 

 

 

간화선 창시자 대혜선사의 편지글(43) 

 

26. 향시랑(向侍郞)에게 답함.

 

편지에서 그대가 "깨치고 깨치지 못한 것, 꿈과 깨어 있는 것이 하나이다."라고 생각하는 사실을 알았는데, 이것도 한 조각 인연입니다.

석가세존께서는 "네가 반연(攀緣)하는 마음으로 법을 듣는다면 이 법 역시 반연이다"라고 하셨읍니다.

"지인(至人)은 꿈이 없다" 라고 말한 것은 상대적 개념인 유무(有無)의 무(無)가 아니라, 꿈과 꿈 아닌 것이 하나라는 사실을 말한 것입니다.

이것으로 보면 '부처님께서 꿈속에서 보신 '금으로 만든 북'과 고종(高宗)이 꿈속에서 '이야기를 전해받은 것'과 공자가 '두 기둥 사이에서 잔 올리는 걸' 꿈꾼 것에서 꿈이라던가 꿈이 아니다 라는 풀이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을 돌이켜보니 마치 꿈 속의 일과 같다"고 경전 속에서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꿈 자체는 전적으로 망상인데도 중생들의 거꾸로 뒤바뀐 생각때문에 날마다 주어진 눈 앞의 경계를 실제로 삼아서 조금도 전체가 꿈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 가운데에 다시 허망한 분별로서 꽁꽁 묶인 생각으로 식신(識神)이 어지러워진 것을 실제의 꿈으로 삼고 있으니, 바로 꿈 가운데 꿈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조금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전도된 것에서 또 다시 전도된 것인 줄를 알지 못하고 있읍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큰 자비로 이루어진 안타까운 마음으로 모든 법계의 모든 안립해(安立海 : 진여의 세계)에 있는 모든 티끌에 두루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낱낱의 티끌 가운데서 '꿈 자재 법문'으로 세계의 바다에 있는 티끌처럼 많은 중생이 삿된 정(定)에 머물고 있는 것을 개오(開悟)시켜 정정취(正定聚: 반듯이 깨달음을 얻을 것으로 분류되는 사람)에 들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 또한 거꾸로 뒤바뀐 중생들에게 눈앞에 있는 실제 경계로서 안립해를 삼는 것을 두루 보여 줌으로서, 꿈과 꿈이 아닌 것들이 모두 다 허깨비라면 전체의 꿈이 실제이며 실제 있는 전부가 꿈이어서 취할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는 것입니다. '지인(至人)은 꿈이 없다'는 뜻이 이와 같을 뿐입니다.

 

보내온 편지의 물음을 보니, 제가 서른 여섯살 때 의심했던 것이어서 이를 읽고 저도 모르게 가려운 곳을 긁어 주듯 마음이 상쾌했읍니다. 저도 일찍이 이 물음을 원오(圓悟) 선사에게 드렸는데 다만 손을 저으시며 "그만두고 망상을 쉬어라, 망상을 쉬어라"고 말씀하셨읍니다.

 

다시 저는 "제가 잠 자지 않을 때는 부처님이 찬탄하신 곳은 그대로 행하고 부처님이 꾸짖는 곳은 감히 어기지를 않습니다. 전에 스승과 스스로 한 공부를 의지하여 얻어진 조그마한 경계는 의식이 성성할 때에 모두 받아쓰다가도 깬 듯 만 듯한 잠자리 위에서는 내 자신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꿈에 금은 보화를 얻으면 꿈 속에서 한없이 기쁩니다. 그러다 어떤 사람이 칼과 막대기로 저를 다그치거나 하는 나쁜 경계라도 당하면 꿈 속에서 두려워하고 무서움에 떨고 있습니다. 이것을 스스로 생각해 보니 이 몸이 있어도 잠들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지수화풍이 흩어져 많은 괴로움이 불길처럼 맹렬할 때 어떻게 그 괴로움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 생각이 이르자 비로소 공부가 바빠집니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원오스님께서는 또 " 네가 말하는 숱한 망상이 끊어질 때를 기다려서야 네 스스로 깨어 있거나 잠 잘 때도 늘 한결같은 곳으로 다가가리라"고 말씀하셨읍니다. 

처음 이 말을 듣고 저는 믿지를 못했읍니다. 번번히 혼자 "내 스스로 돌아보면 깨어 있는 것과 잠 자고 있는 것이 분명히 둘인데 어떻게 입을 열어 선(禪)을 이야기할 수 있단 말인가. 만약 '깨어있던 잠 자고 있던 늘 한결같다'라고 한 부처님의 말씀이 거짓이라면 나의 이 병통은 없애야 할 것이 아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말씀은 진실로 사람들을 속이지 않으니, 내 스스로 알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뒤에 원오선사께서 "모든 부처가 나오는 곳에는 훈풍이 남쪽에서 불어온다."라는 말을 듣고 홀연히 답답했던 마음이 사라졌읍니다.

[註 : 원오가 "어떤 스님이 '어떤 곳이 모든 부처가 나오는 곳입니까?'라고 운문에게 묻자, 운문이'동산이 물 위로 간다'라고 답했는데, 나는 그렇게 대답하지 않겠다. 즉 ' 따뜻한 바람이 남에서 불어오니, 한귀퉁이에 서늘한 기운이 돈다'라고 하겠다"라고 말했는데, 대혜스님이 이 말에 크게 깨달았다. 이때 나이가 서른 일곱살이었다.]

이에 비로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진실하고 여여(如如)한 말씀이며, 속이거나 허망한 말이 아니며, 사람을 속이지 않는 참된 큰 자비라는 사실을 알았읍니다. 몸을 갈아서 가루로 만들어 목숨을 바치더라도 그 은혜는 갚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읍니다.

 

가슴에 무엇이 걸린 듯 답답했던 마음이 없어져서야 꿈꿀 때가 바로 깨어 있을 때이며, 깨어 있을 때가 바로 꿈꿀 때인 줄을 알았습니다. 부처님께서 " 깨어 있는 것과 잠자고 있는 것이 늘 하나로서 여여(如如)하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바야흐로 저절로 알게 되었읍니다. 이런 도리는 드러내어 다른 사람에게 보일 수도 없으며, 다른 사람에게 말해 줄 수도 없습니다. 마치 꿈 속의 경계와 같아서 취할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습니다.

 

편지에서 " 깨닫기 이전과 깨달은 뒤의 경계가 다릅니까, 아니면 같읍니까"라고 묻고 있기에, 저도 모르게 사실대로 말을 하고 있습니다.

보내온 내용들을 꼼꼼히 읽어보니 글자마다 지극한 정성입니다. 이는 선(禪)을 묻는 것도 아니고 또한 무엇을 따지는 것도 아니었기에 옛날 의심했던 내용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바라건대 거사께서는 시험삼아 방(龐)거사가 "다만 온갖 있는 바를 비울지언정 절대로 온갖 없는 바를 실제라고 여기질 말라"고 말한 내용을 넌지시 챙겨 보셔야 합니다.

먼저 눈앞에서 늘 일삼는 경계를 꿈으로 안 뒤에, 도리어 꿈 속의 경계를 눈 앞에 옮겨놓는다면,부처님이 꿈에서 본 '금으로 만든 북'과 고종의 '꿈에서 들은 이야기'와 공자가 꿈에서 본 '두 기둥 사이에 제사지낸 것'이 결코 꿈이 아닐 겁니다.

 

                                                             -대혜선사의 서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