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음알이를 방편으로 활용해서 道로 들어가십시오.

2012. 9. 12. 10:33성인들 가르침/과거선사들 가르침

 

 

간화선 창시자 대혜선사의 편지글(10)

 

4-1. 부추밀(富樞密)에게 보내는 답장.

 

보내주신 편지 잘 받아 보았읍니다. 

편지에서 " 어릴 때부터 이 도를 믿기는 했지만 만년에 이르도록 알음알이가 걸림돌이 되어 깨달아 들어갈 곳을 아직 찾지 못했다. 그러기에 아침저녁으로 도를 체득하는 방편을 알고 싶다." 라고 생각하는 사실을 알았읍니다.

너무나 정성이 지극해 감히 외면할 수가 없기에 보내주신 편지를 근거로 약간이나마 말씀드리겠읍니다.

다만 이 깨달아 들어갈 곳을 찾는 마음이 바로 알음알이로서 도의 걸림돌이 될 뿐입니다. 이것 외에 달리 무슨 알음알이가 있어서 그대에게 걸림돌이 되겠읍니까?

결국은 무엇으로 알음알이라고 하고, 알음알이는 어디에서 온 것이며, 걸림돌을 받는 자는 다시 누구이겠읍니까?

 

"알음알이가 걸림돌이 된다"라고 하는 오직 이 한마디에 잘못된 내용이 셋이 있읍니다.

스스로 " 알음알이가 걸림돌이 된다" 라고 말하는 것과,

스스로 "아직 깨닫지 못했다"고 순순히 미혹한 사람이라고 치부해 버리는 것과,

다시 "미혹 가운데 있으면서 깨닫고자하는 의도된 마음을 가지고 깨달음을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 세 가지 전도된 내용이 생사유전(生死流轉)의 뿌리입니다.

곧 바로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아 뒤바뀐 마음이 끊어져야 비로소 깨뜨릴 만한 미혹이 없고, 기다릴 만한 깨달음이 없으며, 걸림돌이 될 만한 알음알이가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이는 사람이 물을 마심에 그 물이 차고 더운가를 스스로 아는 것과 같습니다.

오래 공부하다 보면 자연스레 이런 견해를 내지 않는 것입니다.

 

오직 알음알이를 알 수 있는 마음(주시자) 위에서 그 자리에 걸림돌이 있는지 없는지를 살펴 볼 뿐입니다.

알음알이를 알 수 있는 마음(주시자) 위에 많은 것들이 있습니까 아니면 없습니까? 

 

예로부터 슬기롭게 공부하는 사람들은 모두 알음알이를 잘 활용하여 방편을 삼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알음알이 위에서 평등한 자비를 행하고 모든 부처님의 일을 해 나가는 것이 마치 용이 물을 얻고 호랑이가 산을 의지하는 것과 같읍니다.

마침내 알음알이로 번뇌를 삼지 않으니, 이는 오직 그가 알음알이가 일어나는 그곳(空)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알음알이가 일어나는 그 곳을 알게되면 곧 이 알음알이가 바로 해탈의 장(場)이면서 생사(生死)를 벗어나는 곳입니다.

이미 해탈의 장(場)이면서 삶과 죽음의 문제를 벗어난 곳이라면, 알고(知) 이해하는(解) 것이 사라진 그 당체(當體)는 적멸처(寂滅處)가 됩니다.

이미 알고 이해하는 것이 적멸이라면 알음알이를 알 수 있는 자도 적멸이 아닐 수 없으며, 보리열반(菩提涅槃)과 진여불성(眞如佛性)도 적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에 다시 무슨 번뇌가 있어 걸림돌이 될 것이며, 다시 어떤 곳을 향하여 깨달아 들어갈 곳을 구하겠읍니까?

 

부처님께서는 " 모든 업이 마음에서 생겨나기에 마음을 허깨비와 같다고 한다. 이 허깨비와 같은 마음의 분별을 여윈다면 모든 중생세계가 없어진다."고 말씀하셨읍니다.

 

어떤 스님이 대주(大珠)화상께 " 어떤 것이 대 열반(大涅槃)입니까?" 라고 묻자, 화상께서 "삶과 죽음의 업을 짓지 않는 것이 대열반이다"라고 대답하였고,

그 스님이 다시 "어떤 것이 삶과 죽음의 업입니까?"라고 하자, 화상께서는 "대열반을 구하는 것이 삶과 죽음의 업이다."라고 말씀하셨읍니다.

 

또 육조 혜능은 " 공부하는 사람들이 한 생각에 생사의 마음을 일으키면 곧 마구니 세계에 떨어지고, 한 생각에 모든 견해를 일으키면 곧 외도(外道)에 떨어진다"라고 하셨읍니다.

 

또 유마거사는 " 모든 마구니들은 생사(生死)를 즐기지만,보살들은 처(處)하면서도 버리지 않고, 외도들은 온갖 견해를 좋아하지만, 보살들은 온갖 견해에 대하여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고 말했읍니다.  

 

이것이 바로 지해(知解,알음알이)를 반려로 삼고 방편을 삼아, 알음알이 위(주시자)에서 평등한 자비를 행하고 모든 불사(佛事)를 해 나가는 본보기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모습이 공(空)임을 깨달아서 삶과 죽음과 열반이 모두 적정(寂靜)하기 때문입니다.

 

아직 이 경지에 이르지는 못했더라도 절대로 삿된 무리들의 엉터리 이야기에 속아 귀신 소굴로 끌려 들어가서 눈을 감고 망상을 지어서는 안됩니다.

요사이 조사의 도가 약해졌기에 이런 무리들이 좁쌀처럼 많읍니다. 

참으로 앞이 보이지 않는 한 사람이 많은 사람을 이끌어서 불구덩이 속으로 끌고 가는 꼴이니 참으로 불쌍한 일입니다.

 

정말 그대만은 등골뼈를 곧추세워 가며 이런 모습은 만들지 말기를 바랍니다. 

이런 모습을 짓는 사람은 냄새나는 가죽 주머니를 잠깐 챙겨서 바로 마지막 최고의 법을 삼더라도 마음의 분별은 아지랑이와 같이 어지럽습니다.

설사 마음의 분별이 잠깐 멈출지라도 돌로 풀을 눌러 놓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기에 자기도 모르게 다시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으로 최고의 깨달음을 취하여 편안하고 즐거운 마지막 자리에 바로 이르고자 한다면 이 또한 어려운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저 또한 일찍이 이들에게 속아서 잘못되었기에, 뒷날 진짜 선지식(원오극근)을 만나지 않았던들 거의 일생을 헛되이 보냈을 것입니다.

이것을 번번히 생각할 때마다 견딜 수 없었기에 말을 아끼지 않고 힘서 이 폐단을 없앴습니다. 이제 조금씩 그 그릇됨을 아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치를 빨리 알고자 하면 모름지기 이 한 생각이 한번에 팍 터져야 비로소 삶과 죽음의 문제를 알 수 있고 깨달아 들어간다고 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절대로 깨침을 기대하는 마음을 두어 깨달음을 기다려서는 안됩니다. 

만일 깨달으려는 마음으로 깨친다는 생각을 하면 영원히 깨칠 수 없을 겁니다.

 

다만 망상으로 뒤바뀌어진 마음, 헤아려 가려내는 마음,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마음, 지견(知見)으로 알려는 마음, 고요한 것을 좋아하고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는 마음을 한꺼번에 눌러야 합니다.

이 눌러 내린 곳에서 "어떤 스님이 조주스님께 '개에도 부처님 성품이 있읍니까?' 라고 물으니, 조주스님께서 '없다'라고 답했다"는 화두를 보아야만 합니다.

 

이 '무(無)'란 한 글자가 숱한 나쁜 지견들을 꺾는 무기입니다.

유(有)와 무(無)의 알음알이를 두지 말 것이며, 

이치로서 알았다 하지 말것이며,

의근(意根)에서 헤아려 분별하지 말 것이며,

눈썹을 치뜨고 눈을 깜빡이는 곳에 뿌리 박지 않아야 하고,

언어를 통해 살림살이를 짓지 말고,

할일없이 우두커니 앉아 있어도 안되고, 

들어 보이는 곳에서 지레짐작하지 말고,

화두드는 자리에서 무엇을 얻으려 하지 말 것이며,

문자에서 끌어와 증명하지 말 것이며,

다만 오고 가며 앉고 눞는 일상 삶 속에서 꾸준히 화두를 챙겨 들되,

"개에도 부처님 성품이 있느냐 없느냐"에 "없다"라고 말한 것을 생활 속에서 여의지 않아야 합니다.

 

이와같이 공부를 지어 화두를 챙기다 보면 어느 날 문득 스스로 깨치리니, 모든 일들이 조금도 방해되지를 않습니다.

옛 어른이 "나의 이곳은 산 조사의 뜻이다. 무슨 물건이 있어 그것을 얽어맬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니, 만약 날마다 주어진 삶 속을 여의고 달리 구해 가는 곳이 있다면 이는 물결을 떠나서 물을 구하고 금 그릇을 떠나서 금을 찾는 격이니, 구하면 구할수록 그 뜻은 더욱 멀어지는 것입니다.

 

 

 

                                                             -대혜선사의 書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