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知, 앎)라는 한 글자

2011. 10. 22. 19:44성인들 가르침/과거선사들 가르침

 

 

진리를 드러내는 데 긍정과 부정으로 그 논리를 쓰는 방법이 다르다는 것은

부정의 논리는 잘못된 것을 쳐내고 긍정의 논리는 옳은 것을 드러낸다는 것을 말한다. 또 부정의 논리는 진실을 제외한 나머지 잘못된 모든 것을 가려낸다는 뜻이며, 긍정의 논리는 당체를 바로 가리킨다는 뜻이다.

 

이것은 마치 모든 경에서 설한 바 깊고 오묘한 성품을 매번 불생불멸(不生不滅), 불구부정(不垢不淨), 무인무과(無因無果), 무상무위(無相無위), 비범비성(非凡非聖), 비성비상(非性非相)등으로 말하는, 이 모든 것은 부정의 논리로 당체 아닌 법의 자취를 쓸어 버려서 모든 잘못된 생각을 끊어 버려 제거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지견각조(知見覺照), 영감광명(靈鑑光明), 낭랑소소(朗朗紹紹), 당당적적(堂堂寂寂) 등이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모두 긍정의 논리이다.

만약 지견(知見) 등의 바탕이 없었다면 무슨 법을 드러내어서 참다운 성품으로 삼을 것이며, 무슨 법을 설명하여서 불생불멸(不生不滅) 등이라고 할 것인가.

지금 이 자리에 확실하게 아는 자체가 내 마음의 성품임을 인지하여야만 바야흐로 이 지(知)의 불생불멸 등에 대해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소금을 설명할 때에 담박한 맛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부정의 논리이나, 짠맛이라고 말한다면 긍정의 논리이다.

또 물을 설명할 때에 건조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면 부정의 논리이나, 축축한 것이라고 말하면 긍정의 논리이다.

공종(空宗)은 단지 부정의 논리만 전개하나, 성종(性宗)은 긍정과 부정의 논리를 다 함께 전개한다. 

 

요즈음 사람은 모두 부정의 논리를 깊은 도리로 삼으면서 긍정의 논리를 낮은 수준으로 삼기 때문에 오직 비심비불(非心非佛)과 무위무상(無爲無相), 나아가 일체를 얻을 수 없다는 말만을 중요시한다.

진실로 다만 아니라고 부정하는 말만 오묘한 것으로 삼음으로써, 친히 스스로 법의 당체를 증득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이와 같은 것이다.

 

만일 나의 마음이 허공과 같지 않음을 진실로 안다면 성품이 스스로 신령스럽게 알아 다른 것을 의지해 깨닫지 않으리니, 어찌 인연의 힘을 빌려서 생겨나겠는가. 만약 중생의 근기에 맞춰 세상의 언어를 따라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면 자성(自性) 위에서는 오히려 진실한 언사도 표할 것이 없는 것인데, 여기에 어찌 잘못됨을 부정하는 방편설이 있겠는가. 

 

이것은 마치 지금 자기의 성품을 몸소 증득하지 못한 사람이 단지 다른 것에 의지하여 도통하려는 것을 모방하여 알음알이로만 알려는 것과 같다.

오직 언어 가운데에서 묘(妙)한 소리만 취하여, 그릇된 것을 차단해 없애려는 글을 가지고 최고의 가치로 삼으니, 진리를 아직 보지 못햇했기 때문이다.

 

진실한 자리에 근거하지 않으면서 한결같이 공허한 공(空)에 의탁하여 말에 따라 끌려 간다. 이것이 근래에 와서 더욱 심해지니 이 병폐를 막을 수 없었다.

그러니 만약 선현들이 다문박학(多聞搏學)으로 인해 깊히 부처님의 가르침에 들어 가고 오묘하게 선종의 가르침을 통달하지 않는다면, 어찌 미세한 가르침을 시종일관 회통하여 하나의 신령한 성품을 드러내고 만법의 근원을 열어제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요긴한 문장을 갖추어 똑같이 종경을 밝히는 것이다.

 

이름을 아는 것과 바탕을 아는 것이 다르다고 하는 것은 부처님법과 세간법 하나 하나에 모두 이름과 바탕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만일 세간에서 대(大)라고 칭한다면 네 가지 요소에 지나지 않으니, 이것은 <지론>에서 "지(地),수(水),화(火),풍(風)의 네 가지는 사물의 이름이며, 견(堅),습(濕),난(煖),동(動)의 네가지는 사물의 바탕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지금 물을 가지고 설명하겠다.

어떤 사람이 "맑히면 맑아지나 저으면 탁해지고, 막으면 멈추나 터주면 흘러가면서 만물을 적셔주고 많은 더러움을 씻어 줄 수 있다고 하는 것을 들었는데, 이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이것은 공능의 뜻을 사용하여 물었다),

"물"이라고 답변할 것이다(이름을 들어 답했다.)

어리석은 자는 이름을 안 것으로서 알았다고 인정하나,

지혜로운 자는 "어떤 것이 물입니까?" 라고 다시 질문 할 것이며(體를 따져 물었다), "축축한 것이 물입니다."라고 다시 답변할 것이다(體에서 가리킨다).

 

불법도 그와 같아서 어떤 사람이 묻기를

"모든 경에서 미혹하면 더럽지만 깨달으면 청정하고, 제멋대로 놓아두면 범부이지만 이것을 수행하면 성인이면서 세간과 출세간의 일체 모든 법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들었는데, 이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이것은 공능의 뜻을 사용하여 물었다), "마음이다"라고 답변할 것이다(이름을 들어 답했다).

어리석은 자는 이름을 안 것으로 알았다고 인정하나, 지혜로운 자는 "어떤 것이 마음입니까?"라고 다시 질문할 것이며(體를 따져 물었다), "앎이 곧 마음이다"라고 다시 대답할 것이다.(體를 가리켰다.)

 

이 "앎"(분별없는 순수앎)이란 한 마디 말이 가장 가깝고 가장 확실한 말이니, 나머지 다른 글자와 다른 설명은 모두가 소원한 것이다.

이것은 마치 성(性)도 아니고 상(相)도 아니면서 말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근본 바탕이고, 반연을 생각하여 움직이고 작용함은 마음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으니, 곧 위에서 질문한 내용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것으로써 물의 이름과 바탕을 추론하면 '물'이란 이름은 오직 한 글자로서 나머지 모든 것은 뜻으로 사용하는 것이니, 축축하다는 습(濕)이란 한 글자가 맑거나 혼탁하다는 등의 물에 관한 만가지 작용과 만 가지 이치를 관통하는 것이다.

 

미음이란 이름과 바탕에서도 또한 그러하다.

지(知)라는 한 글자가 탐욕과 분노, 자비와 인욕, 선악과 고락 등의 마음에 관한 만 가지 작용과 만 가지 이치가 있는 곳을 관통하는 것이다.

바로 물이라고 하는 것은 이름으로서 진짜 물이 아니고, 축축한 성질이 진짜 물로서 어떤 개념으로서의 이름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곧 맑거나 탁하고 얼고 흐르는 등의 물의 성질에 관한 어떠한 이치에도 통하지 않는 것이 없게 된다.

 

공종(空宗)과 상종(相宗)은 초학자와 근기가 얕은 사람을 상대하여 그들이 말에 따라서 집착함을 걱정하기 때문에, 단지 명자(名字)를 표방하여 그 잘못됨을 차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광범위한 이치를 사용하여 그 뜻을 끌어낸다.

성종(性宗)은 오래 공부하고 근기가 높은 사람을 상대하여 그들이 말꼬리를 잊고서 근본바탕을 알도록 하기 위하여 한 마디로 그 자리를 바로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달마스님은 "한 마디로 가리켜서 바로 보인다면 곧 '지(知)'란 한 마디"라고 하였다. 만약 즉심즉불(卽心卽佛)이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네 마디 말이 되는 것이다. 만약 이 말을 이해하여 오류없이 받아 들인다면 몸소 신령스런 앎의 성품을 비추어서, 바야흐로 바탕 위에서 마음에 관한 이치와 작용을 관조하고 살피기 때문에 어떠한 법에도 통하지 않음이 없게 될 것이다.

 

                                                                 -宗鏡綠(明樞會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