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도덕경52장,근원으로 되돌아가면 평생동안 근심이 없소.

2011. 6. 17. 19:27성인들 가르침/노자도덕경

 

[무한진인의 노자도덕경 해설 52회]

 

[원문]-백서본

 

天下有始  以爲天下母

천하유시  이위천하모

 

旣得其母 以知其子

기득기모 이지기자

 

復守其母 沒身不殆

복수기모 몰신불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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塞其兌 閉其門 終身不勤

색기태 폐기문 종신부근

 

啓其兌 濟其事 終身不敕

계기태 제기사 종신불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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見小曰明  守柔曰强

견소왈명  수유왈강

 

用其光 復歸其明  母遺身殃

용기광 복귀기명  모유신앙

 

是謂襲常

시위습상

 

[ 한글해석]

 

천하에 시작이 있었으니,

이를 천하의 어미(근원)라고 하오. 

 

그 어미인 근원은 원래부터 지니고 있는 것인데, 

왜냐하면,그것의 자식인 천하가 있다는 것을 (누구나)알고 있기 때문이오.

 

(그러므로 그 나온 곳으로)되돌아가서 근원을 지키고 있으면

몸이 죽는다 할지라도 전혀 두려울 것이 없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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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로 향하는 마음의) 문을 닫아서

쾌락으로부터(자신을) 지킨다면

죽을 때까지 고달프지를 않소.

 

쾌락에 이끌려 다니면서

욕망을 충족시키는 일만 하려고 한다면

죽을 때까지 순탄하지를 못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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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보이지 않는 미세한 것을 볼수 있어야

밝은 지혜라고 말할 수 있고,

 

부드러움을 지킬수 있어야

강하다고 말할 수 있소이다. 

 

그 비춤의 주시작용을 이용해서

밝은 지혜로 되돌아가면,

 

근본바탕에서는

육신의 재앙(原習)이 모두 떨어져 나가게 되는 것이오.

 

이것이 영원한 도를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외다,

 

 

[해 설]

본 52장은 곽점본에 일부 문장이 있으며, 백서본은 15장, 왕필본은 52장입니다.

이번 장은 전체를 세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읍니다.

위의 한문원문과 한글 해석문에 점선으로 구분해 놓았는데,

맨 위의 문단들은 곽점본에는 없고, 백서본과 그 이후의 왕필본 등 여러본에 있읍니다.

중간 문단은 원래 가장 오래된 곽점본에도 있고,물론 백서본과 다른 본에도 있읍니다.

맨 아래 문단은 곽점본에는 없으며, 백서본과 왕필본등 모든 본에 있읍니다.

 

원래 곽점본에는 중간부분 밖에 없었는데, 아마도 백서본 시절 노자도덕경을 편집할 때에 누군가가 맨 윗부분은 서문형식으로, 그리고 아랫문단은 재강조하는 의미에서 결론 형식으로 덧붙힌 것 같읍니다.

이렇게 문장이 상하에 덧붙혀진 것은 아마도 도덕경을 공부하는 학인들에게 일종의 주해(注解)형식으로 이해하기 쉽게 덧붙혀진 것이 오늘날까지 그대로 전수해 내려오는 것 같읍니다.

 

첫문단은 이 세상이 처음 생겨나온,

원래부터 있는 근원바탕으로 되돌아가서 안정되게 지키고 있으면(回光返照),

육체로 인하여 생기는 원습에서 영원히 벗어 나므로,

육체의 죽음에 대한 공포감없이 평안한 삶을 살아갈 수가 있다고 가르치고 있읍니다.

 

중간문단은 의식이 내면의 근원으로 향하면 평생동안 편안하게 살 수가 있고,

의식이 외부 쾌락의 대상을 쫏아다니면서, 욕망을 성취하는 일만 한다면 평생 순탄하게 살지를 못한다고 가르치고 있읍니다.

 

마지막 문단은 전혀 알수없는 미세한 내면을 볼수 있어야 밝은 지혜가 있다고 말할 수 있으며, 아무데도 머물지 말고 자유자재하게 유연해야 영원히 변하지 않는 금강석처럼 강하다고 말하고 있읍니다.

따라서 이렇게 밝고 변함없는 지혜에 도달하려면 앎의 빛이 비치는 주시작용을 이용해서 밝은 지혜를 얻고, 그 지혜가 나온 절대바탕으로 돌아가면 몸으로 인한 모든 원습에서 벗어난다고 말하고 있읍니다.

이것이 바로 근원에 안정되는데 익숙해지는 방법이라고 일러주고 있읍니다.

 

위의 한문해석은 주로 백서본 한문원본을 채택하였으나, 왕필본등 기타본도 거의 비슷한 글자로 되어 있읍니다.

기존 노자 도덕경 해설서들과 약간 차이나는 부분도 있으나,

대략 비슷하게 해석이 된 것 같읍니다.

 

天下有始  以爲天下母

天下有始 : 천하의 시초가 있었으니,

以爲天下母 : 천하가 나온 어미(근원)라고 하오. 

이 세상이 처음 생긴 곳이 있는데,

그것을 세상의 근원이라고 여긴다는 것입니다. 

원래 이 현상세계가 나타난 것은 존재의식으로부터 육체감각의식을 통해서 거울에 반사상이 비치듯 나타난 것입니다.

또한 존재의식은 절대근원으로 부터 나왔다고 말하고 있죠.

따라서 절대근원에서 보편적 존재의식이라는 중간 매개체를 통해서 이 세상이 현상화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러한 존재의식의 중간단계를 생략하고,

오직 절대바탕인 <母>가 이 세상의 근원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읍니다.

<天下母>라는 것은 <천하가 나온 어미> 즉 <세상이 나온 근원바탕>을 말합니다. 

 

旣得其母 以知其子

旣; 이미,처음부터,원래. 得;얻다,알다,만나다.지니다 以: 왜냐하면(이유), 때문에,

旣得其母; 그 어미(근원)를 원래부터 지니고 있는데, 

以知其子; 왜냐하면 그 자식인 천하세상을 (누구나)알고 있기  때문이오.

그런데 그 천하가 나온 그 근원바탕은 원래부터 사람마다 (누구나)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이 세상이 나온 어미(근원바탕)를 이미 지니고 있다는 말은,

이 세상이 나타나기 이전에 이미 근본의 "참나"가 있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 현상세계(천하)는 앎의 빛인 의식 위에 나타난 것이고,

현상세계를 아는 그 앎의 빛자체도 근원바탕(어미)에서 나온 것이죠.

다시 말하면 자기가 낳은 자식을 지켜보는 것은 어미 그자체라는 것입니다.

즉 현상세계(천하)를 지켜보는 주시자는 있는 그대로 절대근원인데,

그것은 누구나 이미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을 안다는 그자체가 바로 그 근원이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확실하게 이해하고 완전히 믿기만 한다면,

도를 깨치기 위하여 어떤 특별한 수행을 해야 한다는 일이 전혀 불필요합니다. 

 

이 문장에서 기존 해석서들과 좀 차이가 납니다.

기존 해석서들은 대개 "이미 어미를 알게 되면, 그 자식도 알게 된다"라고 해석했읍니다만, 이렇게 해석을 하면 항상있는 어미(근원)가 알려지는 대상으로 오해할 수가 있읍니다.

그러나 어미(근원)은 이미 그 이전부터 항상 있는 것이므로, 특정한 때에 알려지는 대상이 아니고, 항상 변함없이 아는 주체입니다.

주체는 절대로 알려 질 수가 없는 것이죠. 그러나 항상 있읍니다.

이것은 아주 미묘한 주제인데, 이것을 완전히 이해하면 더 이상 무엇인가를 알아야 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復守其母 沒身不殆

復;회복하다,되돌리다. 守; 지키다.머무르다. 沒;빠지다,다하다,죽다. 殆;위태하다.두려워하다.

復守其母; (나온 곳으로) 되돌아가서 그 근원(어미)을 지키고 있으면

沒身不殆; 몸이 죽더라도 두려움이 없다. 

지금 "나"라는 개인의식은 현상세계의 일부분으로 나타나 있읍니다.

그런데 그 의식이 의식자체가 나온 바탕으로 되돌아가서 그 근원을 지키고 있으면,전체가 자기자신이므로 육체가 죽던 살아있던 그 참나의 정체성은 영향을 안받는다는 것이죠.

즉 원래상태인 절대바탕(어미)에 합일하게 되면 에고의 개인적인 '나'가 없으므로 육체가 죽더라도 아무 두려움이 없다는 것입니다.

육체란 의식에 나타난 현상계의 극히 일부분으로써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의식의 빛그림자와 같으므로, 영원하고 무한한 참나 입장에서는 잠시 지나가는 꿈속의 그림자같이 아예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개인적인 존재욕구나 육체의 삶에 대한 집착심이 없고,

육체로 인한 인과법칙에서 벗어나므로 원습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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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된 곽점본에는 이 아래 여섯문장만 있으며, 물론 백서본이나 왕필본등 기타 본에도 전부 실렸읍니다만, 글자 몇개가 각각 좀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閉其門 塞其兌  終身不勤(矛山)

閉;막다, 塞; 지켜보다,막다. 변병,요새.가리다.兌;바꾸다,기쁘다,날카롭다,구멍.

勤;걱정하다,괴로워하다.힘쓰다,부지런하다.

閉其門; (외부로 향하는 마음의) 문을 닫고

塞其兌; 쾌락으로부터 (자신을) 지킨다면

終身不勤; 몸이 죽을때까지 고달프지 않네.

위의 문장순서가 백서본,왕필본 기타본 등은 <색기태 폐기문 종신불근>의 순서로 배열되어 있으나,

곽점본의 경우는 <폐기문 색기태 종신불무>의 순서로 바꾸어져 있으므로 여기서는 <곽점본>의 순서와 같이 배치했읍니다.

왜냐하면 그 문장의 순서에 따라서 해석내용이 잘못 바꾸어질 수가 있읍니다.

 

<閉其門>은 외부로 향하는 '의식의 주의'를 말하며, 외부 대상에 대한 관심과 욕망을 닫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해석서들은 '오관의 문' 또는 '감각기관'으로 해석한 곳이 많은데, 육체를 가진 사람으로서 '감각기관을 막는다'라는 것은 '외부대상에 대한 욕망이나 관심을 막는다'라는 말이지,감각기관의 작용자체를 못쓰게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백서본과 기타 왕필본등 후대에 나온 도덕경에는 <폐기문>이 뒤로 배치되고, <색기태>가 앞으로 배치되었는데, 이것은 두문장을 잘못 이해해서 순서를 후대에 바꾸어 놓은 것 같읍니다.

 

<塞其兌>은 '쾌락의 유혹으로부터 자기자신을 지킨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塞>는'변방요새에서 지킨다'라는 의미가 있읍니다.

또한 <兌>는 기쁜것,좋아하는 것, 변화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는 兌가 '구멍'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따라서 <兌>는 쾌락,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 마음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죠.

그래서 <塞其兌>는' 마음을 즐겁게 하여 유혹하는 쾌락으로부터 (자신을) 지킨다'는 뜻입니다.

 

<終身不勤> '몸이 끝날때까지 고달프지가 않다'라는 뜻입니다.

<勤>은 힘쓰다,부지런하다, 고달프다,괴로워하다,등의 뜻이 있읍니다.

그런데<勤>는 원래 곽점본에서는 <矛山,무>자로 <矛>와<山>이 상하로 배치된 글자로 <무>라고 읽읍니다.

이 <무>를 어두울 무자(컴퓨터에서는 찍이지 않음)의 빌린 글자로 보는 학자들이 있는데, 제가 보기에는 일 무자 즉<務>의 빌린 글자라고 추측이 됩니다.

따라서 '할일이 없다'라는 뜻으로 해석해도 무방합니다.

또한 백서본에서는 <勤>자로 썼으므로 <務>자와 비슷한 뜻으로 '고달프지 않다'는 의미와 '할일이 없다'는 의미는 같은 뜻이 됩니다. 

 

마음을 외부의 쾌락 대상에 관심을 안주고, 고요한 내면으로 향하면 

마음이 고요해지고 욕망과 집착이 사라지므로, 바라는 것이 없이 있는 그대로 고요한 절대바탕에 안주하고 있으므로 평안하다는 말씀입니다.

 

啓其兌 濟(塞)其事 終身不敕

啓;열다.열리다,인도하다 ,안내하다. 濟;이루다,성취하다,건느다.塞,:만족시키다.勅;꾸짓다,다스리다,정돈하다.신다.조서 

啓其兌 ; 쾌락에 이끌려 다니면서

濟(塞)其事 ; 그일(욕망)을 충족시키려고 한다면

終身不勅 : 몸이 죽을때까지 순탄하지 못하네.

 

<啓其兌>에서, <啓>는 '열다,열리다'등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는 뜻이 있지만, '인도되다, 안내받다' 뜻도 있으므로 "이끌려 다닌다"로 해석이 되며, <兌>는 앞의 문장과 같이"쾌락'으로 해석이 됩니다.

따라서 <啓其兌>는 <쾌락에 노출되어 이끌려 다니면서>이라고 해석이 됩니다.

즉 밖에 나타난 즐겁게 하는 대상들, 눈을 즐겁게하고, 입을 즐겁게하고, 귀를 즐겁게 하고, 성욕을 채우고,기분을 즐겁게하는 모든 쾌락의 대상들을 그대로 좋아서 쫏아다니는 것을 말합니다.

 

<濟其事> 에서 <濟>는 이루다,성취하다,물건너가다,등의 뜻이며, 곽점본에는 <塞>으로 되어 있는데, 이<塞>의 뜻도 '만족시키다'라는 뜻으로 그 의미가 비슷합니다.

<事>는 일,대상,을 뜻하므로 쾌락을 주는 '욕망의 대상들'을 말합니다.

<濟其事>는 "욕망을 충족시키는 일만 하려고 한다면'이라고 해석이 됩니다.

 

<終身不勅>에서 <칙(勅)>는 원래 곽점본에서는 <淶,래>자와 비슷한 글자로 되어 있는데, 학자들은 <來力,래>자의 빌린 글자로 본다고 합니다.

그리고 백서본에서는 <棘,극>자로 되어 있는데, 이것을 학자들은 <勅,칙>자로 보고 있읍니다.

이 모든 글자들을 학자들은 "순조롭다, 평탄하다, 평안하다'등의 뜻으로 읽어서 해석했읍니다.

필자의 의견도 역시 앞의 <終身不勤>과 반대되는 뜻으로 "평안치 못하다" 또는 "순탄하지 못하다"의 뜻으로 해석했읍니다.

 

외부를 향해서 쾌락의 대상만 쫏아다니며,즐거움만 찾다가는 평생토록 파도타고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처럼 평안한 날이 없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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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래문장들은 곽점본에는 없고, 백서본 시대 이후에 누군가가 덧붙힌 문장 같읍니다.

아마도 중간에 있는 본문의 문장이 너무 간결하게 밑도 끝도 없이 토막나 있는 것 같아서, 후대의 어떤 도덕경 편집자가 결론적인 해설을 덧붙힌 것이 그대로 전수되어 내려온 것 같읍니다.

 

見小曰明  守柔曰强

見小曰明 : 미세한 것을 볼수 있어야 밝은 지헤라고 말할 수가 있고

守柔曰强 ; 부드러움을 지킬 수 있어야 강하다고 말할 수 있네. 

 

<見小曰明> 그대로 해석하면' 작은 것을 보는 것이야 말로 밝다고 말할 수 있다'라고 해석할 수 있겠읍니다.

모양있고 거친 것(현상계)은 당연히 누구에게나 눈에 보이는 것이기 때문에 밝다고(지혜롭다고) 하지 않고 보통 범부의 앎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小>란 단순히 모양이 작은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고, 알수 없는 지극히 미세한 내면 의식을 말합니다.

따라서 <見小>란 <지극히 미세하여 알수없는 내면의 참나를 아는 것>을 말합니다.

<曰明>은 '밝다고 말할 수 있다'는 의미지만, 실제로는 "지혜롭다고 말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모양없고 알수없는 내면의 근원에 닿아야 참으로 밝은 지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守柔曰强> 그대로 해석하면 '유연함을 지킬수 있어야 강하다고 말할 수 있다.'라는 뜻입니다.

<守柔>는 '부드러움을 지킨다'는 뜻이지만, 유연함 그 자체에 머물러 있는다는 뜻이 아니라,어떤 상황에서도 자기 자신을 잃지 않고 조화롭게 적응한다는 뜻입니다.즉 어디에도 머무름없는 무주(無住)와 어디에도 의존함이 없는 무의(無依)를 말합니다.

어디에도 머무름 없고, 의지함이 없는 것이야 말로 금강석처럼 영원히 변함없는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강하다"는 말은 어떤 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영원히 불변하는 절대본성을 말합니다.

불교에서도 항상 변함없는 부처마음을 '금강(金强)'이라고 하며, 금강경은 바로 그 내면에 있는 절대 본체의 영원한 바탕마음을 가장 직설적으로 설명한 경전입니다.

한마디로 모양없는 물처럼, 또는 공기처럼 부드럽지만,바탕의 본성은 변하지 않고 모든 곳에 편재해 있다는 것입니다.

"물처럼 어디에도 머뭄바 없고,어떤 것에도 의지함 없이 항상 부드럽지만 자유스러운 것이 본성이며, 영원히 변함이 없으므로 가장 강한 것이다." 라는 말입니다.

절대바탕은 모든 곳에 편재하고, 모든 것이 작용하도록 생명의 빛을 비쳐주며, 모든 곳에 머뭄바 없이 머물지만, 어떤 것에도 의존함없이 항상 있는 그대로 금강석처럼 강하다,라는 것입니다.

 

用其光 復歸其明  母遺身殃  是謂襲常

用其光; 그 비춤(주시)을 이용해서 

復歸其明; 밝은 지혜로 되돌아가면

母遺身殃; 그 근원바탕에서는 몸의 재앙(원습)이 떨어져 나가게 되오.

是謂襲常;이것이 영원한 도를 따라가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오.

 

<用其光>에서 <光>은 '빛이 비춤'인데, 이는 의식 측면에서 말한다면 의식의 <주시작용>을 말합니다.

따라서 <의식의 주시작용을 이용해서>라고 해석이 됩니다.

"주시작용'이란 의식 또는 마음의 비춤으로 저절로 아는 작용을 말합니다.

 

<復歸其明> <復歸>는 '되돌아간다'는 뜻이며, 의식이 비쳐져 나온 내면의 근원으로 되돌아 간다는 말입니다.

<其明>은 바로 <빛이 나온 근원바탕의 지혜>를 말합니다.

모든 것을 아는 그 앎의 빛이 비쳐져 나온 그 바탕으로 되돌아 가야 밝은 지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근원바탕에 안주하는 것이 바로 밝은 지혜가 되는 것입니다.

밝은 지혜란 전체가 오직 일체이며, 참나의 본성은 공(空)이라는 것을 아는 깨달음을 말합니다. 

<母遺身殃>에서 <母>는 "절대근원,바탕"을 말하며, <遺>는 '잃는다, 버린다'는 뜻입니다. 

<身殃>은 몸으로 인해 생기는 재앙을 말합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육체 동일시에 의한 원습"이라고 볼 수 있읍니다.

몸으로 생기는 재앙(원습)에서 가장 기본되는 것은 "내가 있다"는 존재의식이며, 이로 인해서 '내가 육체다'하는 개체에고 의식인 감각적 마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육체감각기관의 반응과 생기작용, 의식의 흐름 등이 이원화 감각마음을 통해서 현상화되는 이 현시세상이, 실재한다고 착각하여,온갖 감각적 욕망과 집착이 생기게 되고, 이로 인해 스스로 환상의 나락 속에 빠져 드는 것이죠. 

그래서 자기가 몸으로 태어났다고 여기는 몸과의 동일시가 이원화 의식의 환상에 빠져드는 근본적인 인간의 원죄라고 볼 수가 있읍니다. 

이상태를 여기서는 간단하게 <身殃- 몸의 재앙>이라고 표현했읍니다.

자기가 몸이라고 동일시하면 운명의 수레바퀴인 윤회, 원습적인 고통을 가슴에 껴안고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母遺身殃>이란 뜻은 " 절대근원에서는 몸의 재앙(원습)들이 떨어져 나간다"

즉 절대바탕에 안정되게 머무르면 원습으로부터 해방되고 모든 고통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입니다.

 

<是謂襲常> 에서 <襲>은 ' 인습하다,따라다닌다,익숙해지다.'등의 뜻이 있읍니다.

<常>은 '영원한 도' 즉 움직임 없는 절대바탕인 근원을 말합니다.

<이것이 영원한 근원을 따라가는 것이다, 또는 이것이 영원한 절대바탕에 익숙해지는 것이다.>라고 해석이 됩니다.

즉 앞에서 말했듯이 사람이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이 모든 의식작용은 그 의식의 빛이 그 이전의 내면 어딘가로부터인가 비쳐 오기 때문에 그런 앎의 작용들이 있는 것이죠.

그래서 그 앎의 빛이 비추어지는 근원을 따라 내면으로 깊숙히 들어가다 보면, 그 앎자체를 넘어가게 되고, 존재의식이라는 기본 의식자체까지 도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기본 존재의식상태가 바로 위에서 말하는 밝은 지혜의 상태이며, 이 현상세계의 주시자, 또는 진지(眞知)라고도 합니다.

이 밝은 지혜의 상태에 머물러 안정되어 있으면, 그 지혜가 나온 근본바탕을 깨닫게 되는 것이죠.

그 최종의 근본바탕이 바로 절대본체, 참나,진아,니루바나,라고 부르는 우리들의 공통된 본성,절대바탕인 것입니다.

앎의 빛이 비추는 주시작용을 이용해서 의식의 근원, 참나에 안정될 수가 있다고 가르쳐 주고 있읍니다.  

 

비록 한문 몇개의 글자로 구성돤 간단한 글입니다만

구도 수행법의 핵심에 대하여 명확하게 가르쳐 주고 있는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무한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