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없는 사람이 귀한 사람이다(無事是貴人)

2010. 4. 14. 19:37성인들 가르침/과거선사들 가르침

 

 

임제스님께서 대중들에게 말씀하셨다.

구도자들이여,

참으로 바른 안목을 얻어서 천하를 이리저리 다니더라도 이같은 도깨비들에게 홀리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일없는 것이 귀한 사람이니,

일부로 조작하지 말고 평상 그대로 하면 될 뿐이다.

그대들은 바깥에서 곁으로 허둥대며 찾으려 하나 벌써 틀렸다.

부처를 구하려 하나 부처는 이름 뿐이다.

그대들은 내달려 구하는 그것 자체를 아느냐?

시방삼세 부처님과 조사들도 오로지 법을 구하기 위해 세상에 나오셨고,

지금 참구하여 도를 배우는 사람들도 법을 구하기 위할 뿐이니,

법을 얻어야 비로소 끝나고 얻지 못하면 예전대로 다섯 갈래의 길에 떨어져 윤회한다.

 

무엇이 법인가?

법이란 마음법을 말한다.

마음법은 모양이 없어서 온 시방법계를 꿰뚫어 눈앞에 그대로 작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철저하게 믿지 못하고서 다만 명칭과 개념을 그것으로 착각한다.

그리하여 문자 속에서 부처다 법이다 하며 알음알이로 찾고 헤아려 천지차이로 달라지는 것이다.

 

구도자 들이여,

내가 법을 말할 때 무슨 법을 말하는가?

마음자리의 법(心地法)을 말한다.

그것은 범(凡)에도 들어가고 성(聖)에도 들어가며,

깨끗함에도 들어가고 더러움에도 들어가며,

진리에도 들어가고 세속에도 들어간다.

그러나 너희는 眞,俗,凡,聖,이 아니기에 모든 眞俗凡聖에게 이름을 붙혀주는 것이지,진속범성이 이 사람에게 이름을 붙혀주는 것이 아니다.

 

구도자들이여,

잡았으면 그대로 쓸 뿐 다시 무슨 이름을 붙이지 말아야 하니,

그것을 일컬어 깊은 뜻(玄旨)이라고 한다.

나의 법문은 천하의 누구와도 같지 않다.

가령 문수,보현이 와서 바로 눈앞에 각기 몸을 나투어 법을 묻는 경우

'화상께 묻읍니다'하자마자 나는 벌써 알아차려 버린다.

또 그저 편안히 앉아 있는데 한 납자가 찾아와 만나 볼 때도 나는 다 알아차리고 만다.

어째서 그런가?

나의 견처는 다른 사람들과 달라서 밖으로는 凡이다 聖이다 하는 생각을 내지 않고,안으로는 근본자리에도 머므르지 않으며,

꿰뚫어 보아서 다시는 의심하거나 잘못되지 않기 때문이다.

 

구도자들이여,

부처님법은 애써 공부할 것이 없고,

그저 평상대로 아무일 없는 것이다.

똥 싸고 오줌 누며, 옷 입고 밥 먹으며, 피곤하면 눕는다.

어리석은 사람은 나를 비웃겠지만 지혜로운 이는 알 것이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 밖으로 공부를 하는 사람은 도데체가 바보들이다."라고 하였다.

그대들이 어디를 가나 주인공이 되기만 한다면 선 자리 그대로가 모두 참되어서

경계가 다가온다 하더라도 그대들을 어지럽히지 못한다.

설령 묵은 습기와 5무간죄의 업보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 자체가 큰 해탈바다가 되는 것이다.

 

요즘 공부하는 이들은 도데체 법을 모른다.

마치 양(羊)이 코를 들이대어 닿는대로 입안으로 집어넣는 것처럼,

머슴인지 주인인지 구분치 못하고, 나그네인지 주인인지 구분치 못한다.

이와 같은 무리들은 삿된 마음으로 道에 들어왔으므로 번잡스런 곳에는 들어가지 못하니,어찌 진정한 출가인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야말로 꼼짝없는 속인이다.

 

출가한 사람은 모름지기 평상(平常) 그대로의 바른 안목을 잘 가려내야 한다.

그리하여 부처와 마구니를 구분하고 참됨과 거짓을 구분하며,

凡과 聖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가려낼 수 있으면 참된 출가라고 할 수 있지만,

부처와 마구니를 구분하지 못한다면 그저 한집에서 나와 또 다른 집으로 들어간 것에 불과하다.

이는 업을 짓는 중생이지 진정한 출가인이라고 할 수없다.

지금 부처와 마구니가 한몸이어서 물과 우유가 섞여 있듯 구분할 수 없다.

그러나 거위왕이 우유만을 먹듯이, 눈 밝은 도인이라면 마구니와 부처를 함께 쳐 버린다.

그대들이 만약 聖을 좋아하고 凡을 싫어한다면 生死 바다에서 떳다 잠겼다 할 것이다.

 

"무엇이 부처이고 무엇이 마구니입니까?"

그대가 의심하는 그 한 생각이 마구니이며,

그대가 만법이 나지 않고(無生), 마음은 허깨비라는 것을 알면

다시는 한 티끌 한 법도 없어서 어딜 가나 청정하게 되니, 그것이 부처이다.

그러나 부처와 마구니란 깨끗함과 물듬의 두가지 경계이다.

 

내가 보기엔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으며 옛날도 없고 지금도 없어서

깨치면 그만일 뿐,오랜 세월을 거치지 않는다.

닦을 것도 깨칠 것도 없으며,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어서

어느 때이든 다른 어떤 법도 없는 것이다.

설사 이보다 더 나은 법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꿈같고 허깨비 같은 것이라고 나는 말한다.

이것이 내가 말하는 전부다.

 

구도자들이여,

지금 바로 눈 앞에서 호젓이 밝고 역력하게 듣고 있는 이 사람은 어디를 가나 걸림이 없고 시방세계를 꿰뚫어 3계에 자유자재하니,

온갖 차별된 경계에 들어가도 휘말리지 않는다.

한 찰나에 법계를 뚫고 들어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말하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말하며,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말하고, 아귀를 만나면 아귀를 말한다.

어느 국토를 가든지 거기에 노닐면서 중생을 교화하나,

단 한번도 일념(一念)을 떠난 적이 없고,

곳곳마다 청정하여 시방법계에 빛이 사무치니, 만법이 한결같다.

 

구도자들이여,

대장부가 본래 아무일 없는 줄을 오늘에야 알았다.

다만 그대들은 믿음이 부족하여 생각생각 내달리며,

자기 머리는 놔두고 다른 머리를 찾아 스스로 쉬지를 못한다.

예컨대 원돈교의 보살들은 법계에 들어 몸을 나투고,

정토에서는 凡을 싫어하고 聖을 좋아한다.

이러한 무리들은 갖고 버리는 것을 잊지 못하고,

물들었다니 깨끗하다느니 하는 마음이 아직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선종의 견해는 그렇지 않아서 바로 지금일 뿐,

다른 시절이란 없다.

내가 말하는 것은 모두가 병에 따라 약을 쓰는 일회적인 치료일 뿐 실다운 법이라고는 없다.

만약 이렇게 볼 수 있다면 참된 출가여서, 하루에 만냥을 황금이라도 녹일 수 있다.

 

구도자들이여,

경박스럽게 제방의 장로들에게 인가를 받아 가지고

"나는 禪을 알고 道를 안다"고 나불대지 말라.

폭포수처럼 말솜씨가 유창하다 해도 이는 모두 지옥 갈 업을 짓는 것이다.

진정한 납자라면 세간의 허물을 구할 것이 아니라 바른 안목을 구하는 일이 절박하다.

바른 견해를 통달하여 뚜렷이 밝다면 바야흐로 일해 마쳤다 하리라.

 

구도자들이여,

나는 어느 때는 먼저 비추고(照)나서 작용(用)하며,

어느 때는 먼저 작용하고 나서 비추며,

비춤과 작용을 동시에 하기도 하고,

비춤과 작용을 모두 하지 않기도 한다.

 

먼저 비추고 나서 작용하는 것은 주관(人)의 경우이고,

먼저 작용하고 나서 비추는 것은 대상(法)의 경우이다.

비춤과 작용을 동시에 하는 경우엔 밭가는 농부의 소를 몰고 가버리고

배곺은 사람의 밥을 뻬앗는 격으로서,

뼈를 두드려 골수를 뽑아내고 침으로 아프게 찌르는 일이다.

 

비춤과 작용을 모두 하지 않는 경우는 물음도 있고 대답도 있으며,

주객을 모두 인정하여 물과 진흙이 섞이듯 근기에 따라 중생을 지도하는 것이다.

테두리를 벗어난 대근기라면 떠보기도 전에 재빨리 일어나서 갈 것이니,

이래야만 조금은 되었다 하겠다.

                                                                              -임제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