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대사의 무심론(2)

2010. 3. 9. 19:47성인들 가르침/과거선사들 가르침

 

: "보리와 열반을 이미 얻을 수 없다면,

과거 많은 깨달은 성인들이 모두 보리를 얻었다는 것은 가능한 일입니까?

 

: 단지 세속제(世俗諦,이원화 개념적인 관점)의 문자로 말하여 얻었다고 하는 것이지만, 진제(眞諦,비이원적인 절대상태의 관점)에서는 사실 얻은 바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까닭에 유마경에서 말하길,

"보리란 몸으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마음으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하였고,

또 금강경에서는,

"어떤 조그마한 법도 얻을 바가 없다"한 것이다.

모든 깨달은 성자들은 단지 얻을 바없이 얻은 것이다.

마땅히 알라.

마음이 있으면 일체가 있고, 마음이 없으면 일체가 없는 것이다.

 

문 : 스승께서는 이미 일체 모든 것이 무심(無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목석(木石)도 또한 무심이니 (마음이)어찌 목석과 다르겠읍니까?

 

답 : 그런데 내가 무심(無心)이라고 한 심(心)은 목석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비유컨대 하늘의 북(天鼓)이 비록 또한 무심이나

자연의 갖가지 묘법을 내어 중생을 교화함과 같다.

또한 여의주(如意珠)가 비록 또한 무심이나

자연스럽게 능히 갖가지 변화무쌍한 색갈을 짓는 것이나 같다.

그런데 내가 무심이라고 한 것도 또한 이와같아서,

이것이 비록 아무 생각이 없긴 하지만 능히 제법 실상을 잘 자각하고,

진실한 참앎과 삼신(三身)을 갖추어 응용함에는 걸림없이 자유자재하다.

따라서 '보적경'에 이르길,

"무심(無心)의 의(意)로써 현행(現行)한다"하였으니,

어찌 목석과 같겠는가.

무릇 무심(無心)이란 곧 진심(眞心)을 말하며,

眞心이 곧 無心이다.

 

: 지금 마음상태에서 어떻게 해야 수행이 되는 것입니까?

 

: 일체의 하는 일에서 무심(無心)을 깨달음이 곧 수행하는 것이지,

이 외에 따로 수행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잘 알아라,

무심이 곧 일체 모든 것이고, 적멸(寂滅)이 곧 무심이다.

 

제자가 이에 홀연히 깨달아서,

비로소 마음 밖에 따로 사물이 있는 것이 아니며,

사물을 떠나 따로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마음을 내었다 멈추었다 이리저리 움직여 씀에 언제나 모두 자재하고,

모든 의혹의 그물을 끊어 다시는 걸림없게 되었다.

곧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올리고,

무심(無心)임을 마음에 새기며 이에 게송으로 말하였다.

 

심신(心神)은 항상 적멸하니

색도 없고 형상도 없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소리가 없네.

어두운 듯 하나 어두운 것이 아니고,

밝은 것인 듯하나 밝은 것이 아니며

이를 버려도 멸하지 아니하고,

이를 취하여도 생함이 없네.

 

크다하면 바로 법계를 두루 감싸안고,

작다하면 터럭이 닳아지도록 (집착하길) 멈추지 않으며,

번뇌가 이를 혼탁하게 하여도 맑게 됨이 없읍니다.

진여란 본래 분별함이 없이

능히 유정(有情)과 무정(無情) 중생들에게 가르침 펴며

이를 취하면 일체가 불립(不立, 不存立)하고,

이를 흐트려 퍼지게 하면 일체 중생에게 두루 퍼집니다.

신묘한 심신(心身)은 짐작으로 알수있는 바가 아니며,

올바로 추구하는 것은 바로 수행을 끊는 것입니다.

대도(大道)는 적멸이라 이를 무상(無相)이라 하고,

만상(萬像)은 깊고 아득하여(深玄) 무명(無名)이라 하며,

이와같이 운용(運用) 자재(自在)함이

모두 無心의 정수(精髓)입니다.

 

스승이 또 말씀하셨다.

모든 반야(智慧) 가운데 無心반야가 최상이다.

까닭에 '유마경'에서 말하길,

<無心의 의(意)로써,

감수(感受)받지 않는 行으로써 외도를 모두 굴복시킨다.>라 하였고,

또 '법고경'에서,

<만약 마음을 얻을 바 없고, 법도 얻을 바 없으며, 죄와 복 또한 얻을 바 없고,

생사 열반 또한 얻을 바 없고, 내지는 일체 모두를 얻을 바 없으며,

얻을바 없음을 또한 얻을 바 없는 것임을 안다면--->이라 하였다.

이어 게송으로 말하였다.

 

예전에 미혹한 때에는 마음이 잇었으나

지금 깨닫고 나니 무심(無心)이네.

비록 무심이나 또한 능히 비추는 공용(功用)이 있고,

비추는 功用 항상 적정(寂靜)하여 그대로 여여(如如)하도다.

 

다시 게송으로 말하였다.

 

무심(無心)이고, 비춤도 없으며, 또한 공용(功用)도 없나니,

비춤도 없고, 공용도 없는 것이 그대로 무위(無爲)라네.

이것이 여래의 진법계(眞法界)이고,

보살이나 벽지불과는 다르네.

 

무심(無心)이란 곧 망상심(妄想心)이 없는 것이니라.

 

: (무심을) 왜 태상(太上)이라 합니까?

 

: 태(太)란 크다는 뜻이다.

상(上)이란 높다는 뜻이다.

높은 묘리(妙理)를 완전히 통달한 까닭에 태상(太上)이라 한다.

또 태(太)란 크나큰 위(位)를 통털어 말한 것이다.

삼계(三界)의 천(天)이 비록 연강(延康)의 수복(壽福)을 누리나 다함이 있고,

이 때문에 마침내 육취(六趣,六道)에 윤회하기에 태(太)라 하기엔 부족하다.

십주(十住)보살은 비록 생사를 떠났으나,

묘리를 떠남이 아직 지극하지 못함에 역시 태(太)가 되지 못한다.

십주보살은 수심(修心)하되 마음을 망령되이 있다하고 무심에 들고자 하며,

또한 저 무(無)와 유(有)를 모두 넘어선 불망(不妄)의 진실한 중도(中道)가 되지 못하니, 역시 아직 태(太)가 아니다.

또한 망(妄)인 有와 無 그리고 중도의 삼처(三處)가 모두 다 적멸하여야 묘각(妙覺)의 위(位)가 되는 것이다.

보살은 이 삼처를 비록 버렸으나 묘(妙)한 바에 능하지 못하거나(상위의 보살),

묘(妙)하지 못하니(하위의 보살) 역시 아직 태(太)라 하지 못한다.

또한 그 묘(妙)도 잊어 버리면 이것이 곧 불도(佛道)의 지극(至劇)이며,

사량분별을 넘어선 자리다.

사량분별이 없게 되면 사려(思慮)도 없게 되고,

아울러 망심(妄心)의 지(知)도 영원히 사라지며,

각조(覺照)도 모두 적멸하게 되어 적연(寂然) 무위(無爲)하나니,

이를 이름하여 태(太)라고 하는 것이다.

태(太)란 리(理)가 지극(至極)하다는 것이고,

상(上)은 비할 바 없는 최상(無等等)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태상(太上)이라 하는 것이니 곧 불(佛) 여래(如來)의 별명(別名)이다.끝.

 

                                                                    -달마대사의 無心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