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라만은 속성이 없는 것이고, 마야는 속성이 있는 것이다.

2009. 10. 18. 20:26성인들 가르침/시다르메쉬와르 마하리지

 

 

 

순수한 부라만은 순수의식으로써 체험된다.

이것을 무속성(無屬性), "특성이 없는 절대바탕" 또는 "니루구나(Nirguna)"라고 부른다.

환상(마야)은 속성(屬性)을 가지고 있으며 보여질 수가 있는 것이다.

무엇을 마야라고 불러야 할 것이며, 무엇을 부라만이라고 불러야 할 것인가?

내가 그대들에게 말해주겠다.

 

'부라만이 실재한다' 혹는 '마야가 실재한다'고 결정하는 것은 마음이다.

마음 속에서 어떤 말도 만들지 않는 것이 '부라만'이며,

어떤 말이든 말을 만들어 내는 것이 '마야'다.

 

부라만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의식의 단일한 촛점이 되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에서) 다른 무엇인가를 상상한다는 것은 어떤 한계성를 가정(假定)하는 것이다.

그대의 '있는 그대로' 자연스러운 상태가 부라만이다.

 

그대가 "나는 없다"라고 말할지라도, 

그것은 그대가 말을 바탕으로하는 개념일 뿐이다.

이런 경우에 그대가 그렇게 주장한다고 해서 그대가 부라만이 될 것인가?

그렇게 말하지 못한다고 해서 부라만이 되지 못하는가?

그렇지 않다,

그것에 대하여 어떤 말이 없을지라도,

변함없이 그대는 "진아현존"에 항시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하게, 그냥 있는 그대로 있다.

그대가 그렇게 말하든, 말하지 않든 간에 상관없이,

그것은 그냥 항시 있는 그대로 있는 것이다.

 

"이것"은 부라만이고, "저것"은 마야다,라고 아는 것은

네번째 상태 또는 "투리아상태"라고 부르는데,

또한 그것을 "전체적인 주시 상태"라고 부른다.

 

투리아는 일체를 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모든 것"이 실재하지 않는 비존재상태일 때에,

알려지는 대상이 무엇이 있을 것인가?

부라만은 옳바른 마음의 결정이지만, 마야는 의심스런 상상물인 것이다.

"주시자", "생명력", "생기"라는 말들은 모두 부라만 위에 덧붙힌 이름들이다.

 

주시하는 특성은 어떤 원인도 없이 저절로 온다.

왜 그런가?

주객 이원화라는 모순(矛盾)이 있기 때문에,

관찰자의 속성이 존재 속으로 들어온다.

 

"전체의식의 움직임" 인 생명기운 에너지(生氣)도 또한 거짓으로 덧붙혀진 것이다.

주전자 안의 공간, 실내의 공간, 밖의 우주공간은 각자 불필요하게 붙혀진 이름들인 것이다.

모두가 다 똑 같은 하나의 공간일 뿐이다.

마야가 실재한다고 여기기 때문에

이들 모든 다양한 모양과 이름들이 사용되는 것이다.

 

깊은 잠 속에서는 시간도 없고, 공간도 없다.

깨어있는 생시상태도 긴 꿈에 지나지 않는다.

환상이 실재(實在)로써 나타나는 한에는 주시작용도 참된 것처럼 여겨진다.

 

마음은 모든 것을 관찰하지만,

그러나 만일 마음이 주절거리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그것이 바로 "無心" 또는 "마음 넘어"가 되는 것이다.

 

마음이 지금 불만이 없다면, 그것은 어떤 것도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다.

우리들은 자기의 존재가 무엇인지를 깨달으므로써, 욕망은 지금 조용해진다.

이말이 의미하는 것은 말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바라는 마음(욕심)이 더 이상 없는 것이다.

그것이 "마음없음" 또는 "無心"인 것이다.

 

이 설명은 모두 과학적인 관점으로 말하는 것이다.

이 세상은 환상이다.

모든 언어와 법칙은 환상 속에서만 존재한다.

이원화(二元化)가 있을 때에 모든 것이 나타난다.

이원화가 사라지면 모든 것도 사라져 버린다.

자연법칙,과학, 법등 모든 것도 사라진다. 

 

그것은 마치 정부에 의해서 몰수되는 어떤 소유자 없는 재산과 같으며,

그 재산은 정부가 소유하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

정부는 "막강한 힘"이다.

이 환상 속에서는 그대가 그대의 소유물이 된다.

돈을 빌려준 사람이 일만 루피를 잃어버렸다.

그는 이전보다 더 가난하게 되었다.

그의 재산 범위가 좀 줄어 들었다.

공주가 거지와 결혼하면 ,그녀도 거지가 된다.

만일 그녀가 왕자와 결혼 했다면 그녀는 여왕이 되었을 것이다.

백단향 가루(神性을 상징)를 코부라 뱀에게 발라주어도, 그것은 매일 다른 동물들을 숨어서 공격할 것이다.

 

완전히 깨달은 스승을 믿고 그 곁에서 떠나지 않는 수도자는 그 스스로 완전히 깨달은 자가 된다.

그래서 그는 전체 우주의 주인이 된다.

마음이 사라질 때에, 네번째 상태인 투리아(존재,의식,지복)상태도 사라지며,

개인과 신이라는 이원화 상태도 또한 사라진다.

이원화 상태와 비이원화 상태라는 것이 둘 다 모두 사라진다.

 

즉, 개념적인 대상 혹은 그대의 자세등은 이원화 또는 비이원화로써, 

두가지가 있다. 

"비이원화"가 있다고 말하는 누군가가 있을까?

이것이 환상(마야)과 부라만의 문제가 풀리는 곳이다.

 

"내가 없다"고 말할 때, 그러면 환상 또는 부라만과의 연결이 끊어지는가?

환상 또는 부라만을 생각하는 것은 오직 마음일 뿐이다.

마음이 더 이상 없을 때에 모든 것이 다 부라만이다.

 

백조가 여행을 떠나면 까마귀가 수상노릇을 한다는 말이 있다.

백조가 다시 수상이 될 때에 모든 종교는 보호를 받는다.

여기서 종교는 자연스러운 작용(無爲)을 의미한다.

우리들의 종교(진아숭배)는 (본성을 깨닫는데) 유익하지만,

다른 종교(특별한 신에 대한 숭배)는 (자기 본성을 깨닫는데) 해롭다.

 

어떤 상상도 없이, 존재하는 것이 순수 부라만이며,

이것은 옛부터 많은 현자들에 의해서 체험된 것이다.

부라만이 이해될 때는, 알려지는 어떤 것이 아무것도 없다.

구도자가 부라만을 알기 시작할 때는

의식이 아무것도 없는 無 속으로 내던져 버려진다.

 

어떤 사람의 마음 안에서는  "아무것도 아님(無)"에 대하여 의심을 하는데,

왜냐하면 그는 그것을 체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일개 경험자가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경험이 펼쳐 질 수 있는가?"

 

이런 사람은 부라만을 체험하기 전에 자기가 별도로 떨어져 있다고 여기는 개별성을 씻어 내버릴 필요가 있다.

해가 그 자신을 만날 수 있는가?

만일 자신이 따로 떨어져 있는 독리된 개체라는 생각이 있는 한에는

부라만은 체험될 수가 없는 것이다.

 

개체성이 없으면, 모든 것이 부라만이 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일체"로서 체험된다면,

그 체험자체가 되는 것 이외에 어떻게 그렇다고 말할 수가 있겠는가? 

 

체험이란 의식 안에 들어 온 "어떤 것"을 말한다.

어떤 것이란 그것 자체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을 말한다.

우리는 이 어떤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우리자신 외에,

우리에게 붙어 있는 그(어떤 이질적인)것의 인상은 의식 안에서 고정되어 있다.

그 "다른 것"을 이해할 때에,

우리는 또한 우리자신이 무엇인가를 이해하게 된다.

 

깨달음이란 이해하는 것이다. 그외에 무엇이 있는가?

"는 깨달음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안다"는 것을 "도 동의한다"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환상이다.

 

진아의 자연스러운 본성이 깨달음이다.

그(진아)가 있기 때문에, 깨달음이 있다.

만일 그가 없다면 깨달음도 없다.

만일 체험자인 진아 이외에 다른 것이 있다는 생각을 품는다면,

그 개념은 즉시로 (진지의 빛에)타서 사라질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썪어서 냄새가 날 것이다.

 

그대가 육체가 아니고,  절대바탕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하는데,

이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그것"인 것이다.

그대가 '그것'과 하나로 합일되어야만, 그것(진아)의 관점에서 보게되는 것이다.

그것이 옳바르게 보는 자세이다.

神을 알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神과는 거리가 멀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풀어야 할 수수께끼인데,

그래서 완벽하게 깨달은 스승이 필요한 것이다.

 

만일 그대가 자신을 별도로 떨어진 개체로써의 보는자라고 여긴다면,

그대는 無知의 어둡고 공허함 속으로 추락할 것이라는 것을,

나는 확실하게 말해두고자 한다.

 

만일 사람이 부라만이 되는 것이 "空"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생각을 되돌려서,

"空"은 부라만이 아니다,라는 내말을 상기해야 한다.

"空" 또는 "無"는 의식의 특별한 한 상태의 속성일 뿐이다.

부라만은 그 넘어에 있다.

 

관찰자 입장으로써는 어떤 경지도 얻지 못하기 때문에,

관찰자가 "관찰 되어져야" 하며,

그러면 부라만으로써 부라만을 체험하는 것이다.

 

"내가 부라만이다"가 되는 것이 직접적으로 "진아를 증명"하는 것이다.

진실을 본 자(깨달은 스승)는 '그대가 바로 진아이다'라고 충고를 해준다.

이후에, 그대가 진아라는 것을 말해 주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누구의 말에 의해서 그대가 이해할 것인가?

지금, 진리를 본 자(진정한 스승,싯다르메쉬와르)가 가르쳐 주는 충고 속에서,

그 말을 믿는 것 자체가 바로 (진아에 대한) 체험인 것이다.

 

구도자는 진아를 깨쳐야 되겠다는 마음의 자연스러운 열망이 있지만,

그러나 그렇게 애쓰는 노력 속에서는 마음이 장님이 되는데,

왜냐하면 마음은 절대진아를 알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체험하려고 애쓰는 그 목표자체가 우리 자신이다.

 

어떻게 꽃이 자기자신에게서 뿜어 나오는 향기를 맡으며 즐길 수 있는가?

육체가 자신이라고 여기는 육체 동일시가 그치면, 그 즉시 부라만이 된다.

사람은  실제로는 원래부터 그 자체가 부라만이다.

이것을 이해할 때에, 앎은 스스로 자기 할 일을 완수한 것이다.

그래서 그 깨달음 위에서 완전해 지는 것이다.

 

                                                                     -S. 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