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황본 육조단경-2

2008. 12. 26. 20:35성인들 가르침/육조단경

 

 

 

6. 법을 전수받다(受法)

오조스님께서 한밤중 삼경에 혜능을 조사당 안으로 불러 <금강경>을 설해 주셨다.

혜능이 한번 듣고 말끝에 문득 깨쳐서 그날 밤으로 법을 전해 받으니 다른 사람들이 아무도 알지 못했다.

이내 오조스님은 단박 깨치는 법과 (금란)가사를 전하시며 말씀하셨다.

"네가 육대조사가 되었으니 가사로써 신표를 삼을 것이며, 대대로 이어받아 서로 전하되, 법은 마음으로써 마음에 전하여 마땅히 스스로 깨치도록 하라."

오조스님은 또 말씀하셨다.

"혜능아, 옛부터 법을 전함에 있어서 목숨은 실날에 매달린 것과 같다. 만약 이곳에 머물면 사람들이 너를 해칠 것이니, 너는 모름지기 속히 이곳을 떠나라."

 

혜능이 가사와 법을 받고 밤중에 떠나려 하니 오조스님께서 몸소 구강역까지 혜능을 전송해 주시었으며, 떠날 때 문득 오조스님께서 처분을 내리시되,

"너는 가서 노력하라. 법을 가지고 남쪽으로 가되, 삼년동안은 이법을 펴려하지 마라. 환란이 일어나리라. 뒤에 널리 펴서 미혹한 사람들을 잘 지도하여, 만약 마음이 열리면 너의 깨침과 다름이 없으리라."

이에 혜능은 오조스님을 하직하고 곧 남쪽으로 갔다.

 

두달 가량 지나서 대유령에 이르렀는데, 뒤에서 수백명의 사람들이 쫓아와서 혜능을 해치고 가사와 법을 빼앗고자 하다가 반쯤 쫏아오다가 모두가 중간에 되돌아 간것을 혜능은 몰랐었다.

오직 한 스님만이 되돌아가지 않았는데 성은 진이며, 이름은 혜명이며, 선조는 삼품장군으로, 성품과 행동이 거칠고 포악하여 바로 고갯마루까지 쫏아 올라와서 덮치려 하였다.

혜능이 고갯마루에서 문득 법을 혜명에게 전하니 혜명이 법문을 듣고 말끝에 마음이 열리었으므로, 혜능은 혜명으로 하여금 "곧 북쪽으로 돌아가서 사람들을 교화하라"고 하셨다.

 

7. 정혜(定慧)

혜능이 이곳에 와서 머무른 것은 모든 관료,도교인,속인들과 더불어 오랜 전생부터 많은 인연이 있어서이다.

가르침은 옛 성인이 전하신 바요 혜능이 스스로 안 것이 아니니, 옛 성인의 가르침 듣기를 원하는 이는 각각 모름지기 마음을 깨끗이 하여, 듣고 나서 스스로 미혹함을 없애어 옛사람들의 깨침과 같기를 바랄지니라.

[아래 부터는 혜능대사의 법어(法語)입니다]

 

혜능대사가 말씀하셨다.

구도자 들이여,

보리반야의 지혜는 모든사람들이 본래부터 저절로 지니고 있는 것이다.

다만 마음이 미혹하기 때문에 능히 스스로 깨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큰 선지식의 가르침을 구하여 자기의 성품을 알아라.

구도자들이여, 깨치게 되면 곧 지혜를 얻느니라.

 

구도자들이여,

나의 이법문은 정(定)과 혜(慧)로써 근본을 삼나니,

첫째로 미혹하여 慧(작용)와 定(본체)이 다르다고 말하지 말라.

定(본체,침묵)과 慧(작용,주시앎)는 몸이 하나여서 둘이 아니니라.

곧 定(침묵본체)은 이 慧(주시작용)의 몸이요,

慧(주시작용,앎)는 곧 定(침묵본체)의 쓰임새니,

곧 慧가 작용할 때에 定이 慧에 있고,

곧 定이 작용할 때에 慧가 定에 있느니라.

 

선지식들아,

이 뜻은 곧 定과 慧가 함께 한다는 말이니라.

도를 배우는 사람은 짐짓 定(침묵)을 먼저 하여 慧(앎,주시)를 낸다거나,

慧(주시)를 먼저하여 定(침묵)을 낸다고 해서,

定과 慧가 각각 다르다고 말하지 말라.

이런 소견을 내는 이는 주객(主客) 이원화 상태에 있는 것이다.

입으로는 착함을 말하면서 마음이 착하지 않으면

慧와 定을 함께 하는 것이 아니며,

마음과 입이 함께 착하여 안팍이 한가지이면 定,慧가 곧 함께 함이니라.

스스로 깨쳐 수행한다 함은 입으로 다투는데 있지 않다.

만약 앞뒤를 다투면 이는 곧 미혹한 사람으로서 이기고 지는 것을 끊지 못함이니,

도리어 법에 대한 아집이 생겨 네가지 모양(四相)을 벗어나지 못함이니라.

 

일행삼매(一行三昧)란 일상시에 가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눞거나 항상 곧은(순수한)마음을 행하는 것이다.

<정명경>에 말씀하시기를 "순수한 마음이 도장(道場)이요, 곧은 마음이 정토(淨土)다"라고 하였느니라.

마음에 아첨하고 삐뚤어진 생각을 가지고, 입으로만 법의 곧음을 말하지 말라.

입으로는 일행삼매를 말하면서 순수한 마음으로 행동하지 않으면 진실로 깨달음을 구하는 구도자가 아니니라.

오직 곧고 순수한 마음으로 행동하여 모든 법에 집착하지 않는 것을 일행삼매라고 한다.

그러나 미혹한 사람들은 삼라만상의 모양에 집착하면서도, 일행삼매를 한다고 죽치고 앉아서 움직이지 않는 것만이 곧은 마음이라고 고집하며, 망심(妄心)을 제거하여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일행삼매라고 한다.

만약 이와 같다면 이 법은 무정(無情)과 같은 것이므로 도리어 道에 방해되는 장애물이니라.

 

道는 모름지기 전체적으로 통하여 자유롭게 흘러가야 한다.

어찌 도리어 꼼짝하지않고 정체(定滯)된 것이 道란 말인가?

마음이 어딘가에 머물러 있지 않으면 곧 통하여 흐르는 것이요,

머물러 있으면 곧 속박되어 있는 것이니라.

 

만약 앉아서 움직이지 않음이 옳다고 한다면 사리불이 숲 속에 편안히 앉아 있는 것을 유마힐이 꾸짖었음이 합당하지 않느니라.

구도자들이여, 또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앉아서 마음을 보고, 깨끗함을 보되, 움직이지도 말고 일어나지도 말라"고 가르치고 이것으로써 공부를 삼게 하는 것을 본다.

미혹한 사람은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문득 거기에 집착하여 전도됨이 곧 수백가지니, 이렇게 도를 가르치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임을 짐짓 알아야 한다.

 

구도자들이여,

定과 慧는 무엇과 같은가?

등불과 그 빛과 같으니라.

등불이 있으면 곧 빛이 있고,

등불이 없으면 곧 빛이 없으므로,

등불은 빛의 몸이요 빛은 등불의 작용이니라.

이름은 비록 둘이지만 몸은 둘이 아니다.

이 定, 慧의 법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8.무념(無念)

구도자 들이여,

법에는 담박 깨침과 점차로 깨침이라는 것은 없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 영리하고 우둔함이 있으니.

미혹하면 점차로 계합하고 깨친 이는 단박에 닦느니라.

자기의 마음바탕을 아는 것이 본래성품을 보는 것이다.

깨달으면 원래는 차별이 없으나 깨닫지 못하면 오랜 세월을 헤메느니라.

 

구도자 들이여,

나의 이 법문은 옛부터 모두가 생각없음(無念)을 세워 종(綜)으로 삼으며,

모양없음(無相)으로 본체를 삼고,

머무름 없음(無住)으로 근본을 삼느니라.

 

어떤 것을 모양이 없다고 하는가?

모양이 없다고 하는 것은 모양으로부터 모양을 떠난 것이요,

생각이 없다고 하는 것은 생각으로부터 생각을 떠난 것이다,

머무름이 없다고 하는 것은 사람의 본래 성품이 생각마다 머무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지나간 생각과 지금의 생각과 다음의 생각이 생각생각 서로 이어져 끊어짐이 없나니, 만약 한 생각이 끊어지면 법신이 곧 육신을 떠나느니라.

 

순간 순간 생각할 때에 모든 법 위에 머무름이 없나니,

만약 한 생각이라도 머무르면 생각마다 머무르는 것이므로 얽매인다고 부르며,

모든 법 위에 순간 순간 생각이 머무르지 아니하면 곧 얽매임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머무름이 없는 것으로 근본을 삼느니라.

 

구도자들이여,

밖으로 모든 모양을 여의는 것이 모양없는 것이다.

오로지 모양을 여의기만 하면 자성의 본체는 청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모양이 없는 것으로 본체를 삼느니라.

 

모든 경계에 물들지 않는 것을 생각이 없는 것이라고 하나니,

자기의 생각 위에서 경계를 떠나고, 법에 대하여 생각이 없는 것이니라.

일백가지 사물에 대한 생각이 없다면 억지로 생각을 제거하려고 하지 말라.

한 생각 끊어지면 곧 다른 곳에서 또다시 생기게 되느니라.

 

도를 배우는 이가 마음을 사용해서는 법의 뜻을 쉬게 할수 없다.

자기의 잘못은 그렇다 하더라도 다시 다른 사람에게 권하겠는가.

미혹하여 스스로 알지도 못하고 또한 경전 법을 비방하나니,

그러므로 생각없음을 세워 종을 삼느니라.

미혹한 사람은 경계 위에 생각을 두고, 그 생각 위에 또 삿된 견해를 일으키므로

그것을 반연하여 모든 번뇌와 망령된 생각이 이로부터 생기느니라.

 

그러므로 이 가르침의 문은 무념(無念)을 세워 종(宗,바탕))으로 삼느니라.

세상사람이 고정관념을 버리고 생각을 일으키지 않아서,

만약 생각함이 없으면 생각없다는 생각조차 없느니라.

'없다' 함은 무엇이 없다는 것이고, '생각함'이란 무엇을 생각하는 것인가?

<없다> 함은 이원화(주체와 대상)의 모든 번뇌를 떠난 것이고,

<생각함>은 진여의 본성을 생각하는 것(一念)으로서,

진여는 생각의 본체요 생각은 진여의 작용이니라.

그러므로 자기의 성품이 생각을 일으켜 비록 보고 듣고 느끼고 알기는 하지만,

일만 경계에 물들지 않은 채로 항상 자재(自在,스스로 홀로 있음)하느니라.

<유마경>에 말씀하시기를

"밖으로 능히 모든 법의 모양을 잘 분별하나,

안으로는 으뜸되는 뜻(第一義)을 품고 있어서 움직이지 않는다" 하였느니라.

 

9. 좌선(坐禪)

구도자 들이여,

이 법문 중의 좌선은 원래 생각에 집착하지 않고, 깨끗함에도 집착하지 않느니라.

또한 움직이지 않음도 말하지 않나니,

만약 마음을 지켜본다고 말한다면,

마음은 본래 허망한 것이며, 허망함은 허깨비와 같으므로 볼 것이 없느니라.

만약 마음이 깨끗함을 지켜본다고 말한다면,

사람의 성품은 본래부터 깨끗함에도 허망한 생각으로 인해서 진여가 가려진 것이므로, 허망한 생각을 무시해 버리면 성품은 본래대로 청정하고 깨끗하니라.

자기의 성품이 본래 있는 그대로인 깨끗함은 보지 아니하고,

또 하나의 생각을 일으켜서 깨끗함을 본다면,

도리어 깨끗하다고 하는 망상(妄想)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니라. 

 

생각과 망상은 처소가 없다.

그러므로 지켜본다고 하는 행위는 도리어 쓸데없는 허망한 행위임을 알라.

깨끗함은 모양이 없거늘,

도리어 깨끗한 모양을 세워서 이것을 공부라고 말한다면,

이러한 소견을 내는 이는 자기의 본래 성품을 가로막아 도리어 깨끗함에 묶이게 되느니라.

 

만약 움직이지 않는 이가 모든 사람의 허물을 보지 않는다면,

이는 자성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미혹한 사람은 자기의 몸은 움직이지 아니하나, 입만 열면 곧 사람들의 옳고 그름을 말하나니,道와는 어긋나 등지는 것이니라.

마음을 지켜보며 깨끗함을 지켜본다는 것은 도리어 도를 가로막는 원인이니라.

 

이제 그대들에게 말하나니,

이 법문 가운데 어떤 것을 좌선이라 하는가?

이 법문 가운데는 일체 걸림이 없어서,

밖으로 모든 경계 속에서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앉음(坐)이며,

안으로 본래 성품을 보아 어지럽지 않은 것이 선(禪)이니라.

 

어떤 것을 선정(禪定)이라 하는가?

밖으로 모양을 떠남이 선(禪)이요,

안으로 어지럽지 않음이 정(定)이다.

설사 밖으로 모양이 있어도 안으로 성품이 어지럽지 않으면

본래대로 스스로 깨끗하고 저절로 정(定)한 것이니라.

 

그러나 만약 경계에 접촉하게 될 때는 잠시 그 접촉으로 인해 마음이 어지러워지는 것 같지만,

즉시 그 모양의 경계를 떠나면 문득 마음이 고요하게 정(定)하느니라.

밖으로 모양과 경계를 떠나는 것이 곧 선(禪)이요,

안으로 어지럽지 않은 것이 정(定)이니,

밖으로 禪하고 안으로 定하므로

선정(禪定)이라고 이름하느니라.

 

<유마경>에 말씀하기를

"즉시에 활연히 깨쳐 본래 마음을 도로 찾는다" 하였고,

<보살계>에서 말씀하시기를,

"본래 근원인 자성(自性)은 깨끗하다"고 하였느니라.

 

구도자 들이여,

자기의 성품은 본래부터 있는 그대로 청정(淸淨)하다는 것을 알아라.

저절로 닦아지고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 자기의 본래 성품인 법신이며,

자연스럽게 저절로 행해지는 것이 깨달은 이(부처)의 행위이고,

자연스럽게 짓고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깨달음(부처)으로 가는 길이니라.

 

                                                                    -돈황본 육조단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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