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11. 16. 12:16ㆍ성인들 가르침/지두크리스나무리티
당신은 결코 명상에 착수할 수가 없다.
명상은 당신의 추구가 사라지면 틀림없이 일어난다.
당신이 명상을 추구하거나 명상하는 방법을 묻는다면,
그때 그 방법은 당신을 제약할 뿐 아니라 현재 제약되어 있는 것마저도 강화한다.
명상은 진실로 사고(思考)의 전 구조를 거부하는 것이다.
사고는 구조적이며, 합리적이거나,비합리적이며, 객관적이거나 불건전하다.
그리고 합리적 이유나 모순, 신경과민의 상태에서 명상을 시도하려고 하면
그런 것들을 그대로 투영하는 걸 피할 수 없을 것이며,
따라서 자신의 의식구조를 참된 실재로 간주 할 것이다.
그것은 마치 어떤 신자가 자신의 신앙을 명상하는 것과 같다.
그는 자신이 두려움 때문에 만든 것을 강화하고 신성화한다.
그때 말(단어)는 우상숭배로 끝나게 되는 그림이나 이미지이다.
소리는 그자신의 울타리를 만들고,
그러한 경우에는 사고의 내용은 그 울타리가 된다.
그리하여 관찰자와 관찰대상을 나누는 것이 이 단어와 음성이다.
낱말은 언어의 단위이자 음성일 뿐 아니라, 어떤 의미에 대한 상기나 상징이다.
명상은 이 낱말이 완전히 없는 상태이다.
두려움의 뿌리는 말의 기계적 구조성에서 나온다.
* * * * *
이른 봄이었으며, 부아(프랑스 지명)에서는 이상할 정도로 온화한 날씨였다.
아직은 새잎이 별로 나지 않았고,
하늘도 봄의 기쁨과 함께 오는 짓푸른 색이 아니었다.
밤나무에는 아직 싹이 돗지 않았지만,
이른 봄철의 향기가 대기 속에 감돌고 있었다.
부아의 그 지방에선 거의 사람들을 볼 수 없었고,
다만 멀리서 지나가는 차 소리를 들 을 수 있었다.
우리는 아침 일찍 산책하고 있었는데,
이른 봄철의 온화하면서도 싸늘한 감촉이 느껴졌다.
같이 걷던 그 사람은 계속해서 논의하고 질문하면서 어떻게 해야 되느냐고 물었다.
"이 끊임없는 분석, 내성적인 검증, 이 조심스러움은 한이 없는 것 같읍니다.
나는 이런 저런 스승을 만나거나 갖가지 명상체계를 시험하는 등 여러모로 애써왔읍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그러한 수단들은 공허하고 충족되지 않은 상태를 남겨 놓았읍니다."
[당신은 왜 당신도 알지 못하는 저쪽 끝에서 부터 시작하지 않는가?
왜 차안(此岸)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피안(彼岸)에서부터 시작하지 않는가?
이미 알고 있는 것보다는 알지 못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라.
왜냐하면 이 끊임없는 검증, 분석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강화하면서 더욱 제약할 뿐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저쪽 끝에서 살아 있다면 이런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저쪽 끝에서 시작하는 겁니까? 나는 그것을 모릅니다. 그걸 볼 수가 없어요"
[당신이 '어떻게 하면 저쪽 끝에서 시작하는 겁니까?' 라고 물을 때 당신은 여전히 이쪽 끝에서 질문하고 있다.
따라서 그렇게 묻지 말고, 다만 당신이 아무것도 모르는 피안으로부터 시작하라.
교활한 사고가 포착할 수 없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시작하라.]
그는 잠시 말없이 있었다. 그때 숫꿩 한마리가 날라갔다.
햇빛을 받아 빛나는 모습이었는데 덤불숲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다시 나타났을 때는 거의 낙엽빗깔인 암꿩 네댓마리와 함께였다.
그 숫꿩은 암꿩들 속에서 위엄있게 서 있었다.
그는 생각이 골몰한 나머지 그 꿩들을 보지 못했다.
그에게 그점을 지적해 주자 그는 "너무나 아름답군요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말뿐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은 어떻게 해야 미지의 것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골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녹색을 띤 긴 어린 도마뱀 한 마리가 바위 위에 앉아 햇볕을 쬐고 있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 저쪽 끝에서부터 시작하는 건지 알 수없읍니다.
나는 진정 막연한 주장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 말씀은 적어도 내겐 너무나 무의미합니다.
나는 알고 있는 것으로만 갈 수 있읍니다."
[당신이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당신은 이미 끝난 것, 완료된 것만 알고 있다. 당신은 어제만 알고 있기에,
<당신이 알지 못하는 곳에서부터 시작하라. 그곳에서 살아라.> 라고 말한 것이다.
당신이 '어떻게 해야 거기서 살 수 있읍니까?'라고 한다면,
그때 당신은 다시 어제의 패턴을 초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알지 못하는 것과 더불어 산다면 당신은 자유 속에 살고,
자유로부터 행동하는 것이며, 결국 그것이 사랑이다.
당신이 '나는 사랑이 뭔지 안다'고 말한다면 그때 당신은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다.
분명히 사랑은 쾌락에 대한 기억이나 회상이 아니다. 아니기 때문에 알지 못하는 것과 더불어 살라는 것이다.]
"나는 진정 당신이 무엇을 말씀하고 계신지 모르겠군요. 당신은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듭니다."
[나는 매우 단순한 것을 묻고 있다.
나는 당신이 파고 들면 들수록 더욱더 존재하리란 걸 말하고 있다.
바로 그 파고드는 행동이 조건이다.
당신이 한삽 퍼낼 때마다 '알수 없는 곳'으로 한 걸음 나아간다.
당신은 당신을 위해 만들어진 새로운 길을 원하거나 아니면 전적으로 다른 차원으로 인도하는 당신 자신만의 발길을 만들기를 바라고 잇다.
그러나 그 차원이 무엇인지 -사변적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모른다면 그때 당신의 발길이 어떤 것이든 간에 이미 알고 있는 곳으로만 갈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버리고 저쪽 끝에서 시작하라.
침묵 속에 있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침묵해야 할지를 모르겠읍니다."
[당신은 다시 '어떻게'로 돌아가고 있다.
'어떻게'에는 끝이 없다.
모든 앎에는 과도한 측면이 있다.
당신이 안다면 당신은 이미 무덤 속에 있다.
존재는 앎이 아니다.]
-지두 크리스나무리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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