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7. 29. 10:07ㆍ성인들 가르침/란짓트 마하리지
< 소개 >
-온갖 삼라만상은 無(제로)에서 나왔다가, 無 (제로)속으로 사라진다.
그런데 왜 두려워들 하는가?-
란지트 마하리지는 1913년 1월4일 인도 봄베이에서 태어났다.
12살 어린 나이에 그는, 운둔해 있어서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위대한 성자인 시다르메쉬와르 마하리지를 만났다.
란짓트 마하리지는 70세가 되던 1983년까지는 대중에게 가르침을 펼치지 않았는데, 그러나 이해에 그의 가르침을 배우고자 그의 은둔처를 찾아오는 구도자들이 너무 많아서 본격적인 가르침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의 가르침은 자기 스승(시다르메쉬와르 마하리지)의 가르치는 기법을 고스란이 이어 받았는데, 그 내용이 지극히 단순하면서도 직설적인 면이 두드러진다.
마하리지 말씀의 특징이라면 절대진아의 근본적인 입장에서의 진솔함, 그것이다.
-모든 것은 환상일 뿐이다.
"나"도 환상이다.
그러므로 "내"가 하는 것은 무엇이든 간에 역시 모두가 환상이다.-
그래서 그는 원래 환상으로써, 없는 것을 향상시키기 위한 어떤 수행방법도 말하지 않았다.
앎을 통해서, 자기자신을 떠맡긴 모든 거짓된 동일시를 폐기하면,
무지의 장막이 벗겨지고, 우리들은 원래 본성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대의 본성을 깨닫기 위해서는 가장 쉬운 방법은 '내가 그것이다'라고 확신하는 것이다."
지성은 단순히 무지라는 병을 고치기 위한 치료에 불과하며,
일단 무지가 사라지면, 지성이라는 앎도 더 이상 존재가치가 없다.
"실재하는 진리 속에서는 앎도 없고, 무지도 없다.
내가 존재하지 않을 때, 내가 사라졌을 때에,
홀로 남아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실재(實在)다.
그것이 에고의 나가 없는 참나인 것이다."
란짓트 마하리지는 2000년 11월 15일 6시16분에 이생을 마감했다.
그는 마지막 날에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육체) 이제 쓸모가 없어졌다. 이것은 사라져야만 한다"
<가르침>
* 실 재 *
만일 그대가 하나의 수행체계를 따르고자 한다면,
깨달은 사람을 따라야만 할 것입니다
여러가지 수행방편들은 모두가 방해물들이며,
실질적으로 만족감을 주지 못합니다.
진리에는 특별한 방편이란 것이 없읍니다.
환상은 많은 수행방편과 많은 문제와 많은 개념들을 지니고 있읍니다.
환상과 개념을 극복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이렇게 묻읍니다.
" 이 모든 생각들은 도데체 어디로 부터 일어납니까?"
생각한다는 것은 언제나 (생각없는 것과는) 동떨어진 다른 일입니다.
無心인 실재를 알기 위해서는 생각없는 無念상태가 요구되는데,
그것이 생각이 없는 무심인 것입니다.
그대가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든 간에 전혀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모든 일은 오직 진아 일 뿐이며,
참나로 부터 별도로 떨어져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읍니다.
생각한다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참나 이외의 어떤 다른 것에 대한 것입니다.
생각이 끝날 때에 무슨일이 일어납니까?
그대는 제로(無)상태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자각한다는 것(깨달음)은 이해를 통해서 전체가 된다는 것일 뿐이다.
명료한 깨어있음에 의해서 사물을 분별하는 이해가 중단되는 것이 자각하는 것입니다.
실재는 성취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은 항상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철저히 이해한 뒤에, 무심을 추구해야 됩니다.
육체가 있는 한에는 사람은 활동을 할 수 밖에 없읍니다.
일상생활에서 그는 자기 어머니는 "어머니"라고 부르고,
자기 부인은 "아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그는 말없이 알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에 그에게 " 당신 이름이 뭐냐?"고 물으면,
그는 자기 이름을 알려 줍니다.
그러나 그는 "나는 그 이름이 아니다"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읍니다.
그 명료함 깨어있음으로 (분별적인) 이해를 짤라 버리는 것이 요구됩니다.
완벽하게 이해한다는 것을 "그것"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것"속에 그냥 있으십시요.
연꽃 잎파리처럼 그대로 있으십시오.
그대는 물속에서 생겨 나왔읍니다.
그대는 물속에서 살고 있읍니다.
그러나 그대는 물에 젖지 않읍니다.
그와같이 머무르시오, 그외에는 아무것도 없읍니다.
그대가 "나는 이것이 아니다."를 단 한번만 알게되면,
어떤 의심도 사라질 것입니다.
나의 스승은 나에게 이렇게 말해 주었읍니다.
"이해한 뒤에, 만일 네가 머물고 싶다면, 그대로 거기 머물러 있어라.
꼼짝 못하는 감방에서 머물러 있어라.
그러나 "나는 희생자가 아니다"라는 것을 기억하라."
사람은 살아가면서 그렇게 빠르게 환상으로부터 벗어날수는 없지만,
"나는 희생자가 아니다"라는 것을 항상 기억하십시오.
에고는 아주 다른 여러가지 모습과 다른 방식으로 변화하면서 남아 있는데,
바로 이런 것이 에고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항상 자각상태를 유지해야 하며,
일단 그대가 (자각상태로) 완벽해지기만 한다면,
더이상 겁날 것은 아무것도 없읍니다.
그대가 보고 있는 모든 것은 환상일 뿐입니다.
만일 그대가 모든 것이 "나자신"이라고 이해한다면,
그것들(보이는 현상들)은 모두 환상인데,
그러면 모든 것은 어디에 남아 있겠읍니까?
사람들은 환상이 아무것도 아닌 無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어떻게 그것들이 그대를 방해하겠읍니까?
어떻게 無가 그대를 방해할 수 있겠읍니까?
그대가 보고, 지각하는 것들은 그대 안에 있는 것이지, 밖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대가 태어나기 이전에 육체가 그대의 것이라고 승인해서 얻은 것도 아닙니다.
마음이 어떤 것을 취하게 되면 ,그것에 집착하게 되고,
그러면 모든 것은 자기와 다른 어떤 것으로 보여집니다.
인간의 마음 속에 공포는 항상 도사리고 있읍니다.
모든 사람이 공포를 지니고 있읍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내가 육체다"라는 것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공포를 일으키는데,
그것은 그대들이 지니고 있는 개념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공포란 세상의 불안정감에 대한 느낌이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모든 현상은 매 순간마다 계속 변화하고 있읍니다.
만일 그대가 무지와 앎의 그 언덕 위로 넘어로 간다면,
일체 공포라는 것은 사라집니다.
그대의 마음은 매순간 변화하므로,
그마음 자체는 스스로 안정되게 머무를 수가 없읍니다.
그러나 만일 마음이 그것이 나온 근원을 깨치거나,
그것이 시작되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면,
마음은 행복해 질 수가 있읍니다.
육체가 있는 한에는 공포가 있읍니다.
만일 그대가 공포가 없기를 원한다면,
공포가 없는 그것이 되어 그대로 있었야 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끝(결과)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최종 바탕의 실재는 끝도 없고, 시작도 없읍니다.
그것은 한계가 없읍니다.
그것은 너무나 미묘해서 생각과 개념들은 그만 정지되어 버립니다.
주객 이원화 상태는 공포를 포함하고 있지만,
일원화 상태는 공포란 것이 전혀 없읍니다.
에고의 가시를 뽑아 버려야 합니다.
이름과 모양을 벗겨 버리면 아무것도 없는 無가 됩니다.
그대가 모든 것은 환상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본다면,
그것이 바로 체험입니다.
그대는 마음이 그렇게 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보려고 하지도 않읍니다.
마음이란 오직 에고의 그대로 부터 벗어나는데 장애물 밖에는 안됩니다.
마음이 말합니다." 그것이 진리다,"
마음이 쭝얼거립니다."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마음을 탐색해 보십시오,
그러면 거기에 마음은 보이지 않읍니다.
그대는 허공을 볼 수 있읍니다.
그대는 허공을 관찰할 수 있읍니다.
그대는 허공을 느낄 수 있읍니다.
그러나 실재(實在)는 허공 넘어에 있읍니다.
허공은 침묵도 없고, 소리도 없으며, 평화도 없는 제로(無) 지대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허공에)조건화를 만드는 것들입니다.
침묵 또한 참나는 아닙니다.
평화도 참나는 아닙니다.
참나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읍니다.
만일 어떤 것이 거기에 있었을 것이라면,
그것이 실제로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참나가 아닙니다.
無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을 혼동시킬 수가 있읍니다.
無는 실재에 필수요건이 되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實在라고 혼동을 야기할 수도 있다.
그런데 구도자는 이렇게 물을수도 있겠읍니다.
"나는 무엇을 해야 됩니까?"
아무것도 하지 마십시요 !
말이 허공으로 이끌어 올려줍니다.
바가바드 기타에서 크리슈나는 이렇게 말했읍니다.
"말이 나오는 그곳, 그곳이 나의 진아다"
그것이 나의 참나입니다.
성경에서도 그리스도 역시 비슷한 말을 했읍니다.
" 그대 자신을 알라,그러면 그대가 이 세상 전체임을 알게 되리라"
생각이 끝나는 곳으로 올라가십시요.
그곳으로 올라가면 진아가 있읍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언제나 "작은 나(에고)없는 참나"라고 부르고 있읍니다.
진아 깨달음이 에고 없는 참나입니다.
현상이 남아 있는 한에는 자아도 남아 있읍니다.
눈은 (원래는)없는 것들을 보는 습관을 가지고 있읍니다.
스승이 그대를 '그것'에 데려다 주며, 실재로 이끌어 올려주면서 말합니다.
"너 자신을 알라"
이것이 중요한 핵심입니다.
-란짓트 마하리지-
'성인들 가르침 > 란짓트 마하리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깨달음으로 가는 길- 새의 길, 개미의 길. (0) | 2009.05.19 |
---|---|
"내가 있다"존재의식은 가장 원초적인 환상이다. (0) | 2008.12.19 |
죽음의 공포 넘어가기 (0) | 2008.11.14 |
아무것도 아님(無)이 그대 자신이오. (0) | 2008.09.16 |
앎과 무지(無知) (0) | 2008.08.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