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7. 11. 10:44ㆍ성인들 가르침/시다르메쉬와르 마하리지
니사르가다타 마하리지의 유일한 스승인
스리 시다라메쉬와르 마하리지의 가르침(3)
그는 어떤 속성(屬性)도 없는 절대자 였다.
이윽고 그는 어떤 속성을 얻게 되었고, 고통을 받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본래고향인 신의 상태에 도달한 후에 탄생과 죽음의 굴레로 부터 풀려났다.
그는 자기의 본래상태에 합일되었다.
신에 대한 온갖 찬가,모든 경전, 그리고 온갖 노력들을 모두 절대자의 영광으로 바치는 것이야
말로 비로소 이들 온갖 방편들이 가치가 있는 것이다.
신의 은총에 의해서 한 인간으로서의 탄생을 얻는 것이다.
만일 어떤 구도자가 노력만 한다면 그는 신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오늘 이자리에서 그것을 이루어 낼수가 있다.
그사람의 본래 자성(自性)에 도달한 것이다.
황금빛 날이 밝아지는 것이다.
그는 불멸의 감로를 마시며 행복해 한다.
오늘 나는 내 본래 고향집에 도착했다.
그 모든 노고가 끝났다.
우리는 그톡록 수많은 해를 보낸후에야 우리들 자신을 만났다.
우리는 각기 서로 헤어져 있었다.
나는 사람들이 자기자신이 되는 것을 성취할 수 있도록 여러사람들에게 지도해 주어왔다.
수백만회의 탄생동안 우리들은 자기본래자신을 잊어 버리고 있었다.
우리는 그동안 속아왔다.
이제 그러한 착각은 사라졌고, 그는 절대자가 되었다.
그는 몸의 형상안에서 한마리 당나귀처럼 행동했고, 그렇게 취급을 받아 왔다.
진아가 몸을 취하고는 진아의 보삼핌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으로 그는 전생애를 허비하고 있었다.
이것이 무지(無知)의 육체형상 속에 있는 "밤"이다.
이 무지가 전 생애기간 동안에 육체의 형상 속에 있는 당나귀를 위해서 일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또 다른 온갖 다양한 종(種)으로 태어난다.
이 무지(無知)가 우리들이 자각하는 것을 방해하는 범인인데,
한 인간의 탄생이란 이런 무지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천박한 사나이는 그 "밤"동안에 어떤 기회를 얻지 못한다.
이것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본성을 스스로 잃어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밤이라 부르든, 무지라 부르든 간에,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고통의 근원이다
예를 하나 들어 보겠다.
정신적으로 약간 미진한 어떤 사내의 몇몇 친구가 그를 놀려주려고 사전에 미리 모의를 해놓고는
다른 친구들이 그에게 술을 잔뜩 마시게 해서 만취상태가 된 것을 보고는,
미리 짠 몇친구가 그의 앞에 다가 와서 큰 소리로 울면서 말했다.
"자네 신세를 보니 참으로 딱한데, 우리로써는 어쩔 수가 없네 그려,
너무 너무 슬프서 울음이 나올 수 밖에 없어.
바로 조금전에 우리가 자네 집에 다녀 왔는데 말야. 자네 부인이 과부가 되어 있더라구---"
그 바보같은 사내가 그 이야기를 듣자 마자 통곡을 하며 울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이 그에게 왜그러냐 고 묻자, 그는 자기 마누라가 과부가 됐다고 말하면서,
"태산같은 슬픔이 나를 덮쳐 온다" 고 웅얼거렸다.
그래서 옆에 있는 친구가 그에게 타이르며 말해 주었다.
"야- 이사람아, 자네가 이렇게 팔팔 살아 있는데, 자네 부인이 어떻게 과부가 될 수 있겠나?
자네는 살아있고, 자네 마누라는 과부가 되어 있다는 것이, 이 두가지가 서로 반대되는 일이 아닌가?"
그러나 그 술고래는 막무가내 였다.
"그게 아냐-, 자네들은 뭘 모르고 있어, 방금 내친구들이 우리집에 갔다 왔는데, 우리 마누라가 지금 과부가 되어 있다는 거야-"
주변에 있는 그의 모든 친구들이 그의 멍청함에 한바탕 웃어댔다.
이 웃기는 에피소드는 술에 만취된 바보 멍충이들에게 나타날수 있는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또한 모든 인간존재에게도 훤하게 드러나고 있는 착각상태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자신의 두뇌를 사용할 생각은 하지 않고, 남을 눈을 통해서 볼려고 한다.
이야기를 다른 방향으로 돌려 보자.
나의 자아는 순수하고 변함이 없다.
그것은 모든 빛 중의 빛이다.
그것은 특정시간에 사라진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것은 존재의 본성이며, 의식, 지복,
그리고 모든 것의 주시자이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그렇다고 인정 할지라도, 우리들은 말한다.
"우리가 어떻게 행복을 성취할 수 있는가?"
-이렇게 한심스럽게 생각한다.
그리고는 우리들은 앞으로 큰 재앙을 당할 까 보아서 신의 자비심을 구하면서 기도에 열중한다.
신 앞에서 코를 문지르고, 자신의 얼굴을 살짝 살짝 때리기도 한다.
우리는 무심결에"나는 하찮은 벌레다"라는 말을 할때도 있다.
그러나 이런 말은 전체적인 입장에서 적절하지 못하다 .
그대는 인생의 목표를 탐구하여 그대의 진아를 체험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대가 죽어야만 할 운명이라는 나쁜 감정을 내버려라.
그것은 그대가 무지라는 술에 취해있기 때문에, 그대 자신 스스로가 창작해낸 것이다.
그러므로 진아 속에서 확신을 세워야 하는 것이다.
주의를 내면으로 돌려야 한다.
어떤 것에 대한 공포도 받아 드리지 말아라.
정신적 변상들로 부터 벗어나서 완전히 그것들을 뿌리 뽑아야 한다.
실제로 만일 한사람이 자기의 본성(나는 누구인가? 또는 나는 무엇인가?)에 대해서만 생각한다면,
"자기가 존재한다"는 사실 만큼 더 위대한 것은 없다.
자아에 대한 확신을 가져라.
"나는 절대자다"라는 확신을 그대 내면에 확고하게 뿌리내려야 한다.
그러면 그대가 이 현상적인 존재의 바다를 건너가는데 확실히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진아의 관점을 통해서만 보라.
다른 사람들의 눈을 통해서는 보지마라.
모든 "관계"라는 것들은 그대를 바보로 만들 준비가 되어있다.
이것을 수행하는 동안에는 육체를 마음에 떠오르게 하지 마라,
왜냐하면 그사람은 뾰족한 창날 끝(교수대에 올라가려고, 자살)으로 올라가려고 할 수도 있다.
"나는 이 육체의 주시자다"
육체는 잠시 머물다 사라지지만,
나의 심장은 판두라다(신)의 발아래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 명상속에 몰입하면 직관적인 인식이 오는 것은 확실하다.
구도자가 이렇게 수행을 하는 중에도 많은 장애물을 만나게 된다.
예를 들자면, 마치 보기 흉한 코를 가진 처녀가 결혼을 성사시켜야만 되는 것처럼,
1700가지 장애물들이 있는 것이다.
무지한 중생들은 이 전체세상에서 그저 헤메기만 하고 있다.
무지 속에서의 삶이란 죽음과 다르지 않다.
음식을 먹고 있는 자는 누구인가?
누구를 위해서 이 모든 보살핌이 있는가?
그대는 모른다.
그는 6가지 환영(5원소-지수화풍공, 1가지-에고)을 보살펴 주고 있다.
육체는 그것이 죽을 때까지 수많은 보살핌을 모두 받는데,
그전체 인생이 그것으로 헛되게 소모되는 것이다.
흰두교 전통에서는 육체가 죽은 후에 몸의 뼈는 장작더미에 태워지고, 머리는 풀덤이에 태워진다.
보고있는 가족들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다.
(죽은)사람이 말한다 "너희들이 이것(시체)으로 부터 해방되고 있냐?
너희들 행동이 마치 내가 살아있는 것 처럼 보인다"
만일 화장실이 완벽하게 청결할지라도, 그것은 어차피 화장실일 수 밖에 없다.
세상이란 생명체들의 집단을 의미한다.
이들은 자기자신이 지니고 있는 본성에 대해서는 어떤 관심도 없다.
그들은 자기 육체만을 돌보면서, 죄와 덕의 한보따리 짐을 짊어지고는 삶을 허송세월 보내는 것이다.
이것이 무지한 사람들의 세속적인 존속(存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기 진아를 깨달으면, 자기가 육체라는 자만감을 버리게 되고,
그래서 영원 불멸의 자기자신을 내면에서 만나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의 모든 행위마다 소정의 결실을 맺게 되는 것이다.
흰두교에 따르면, 고대의 선조들은 기다림을 계속 유지한다.
72세기 말에는 성취된다고 하며, 그래서 그들은 행복하다.
이것은 母의 기원전 36세기와 父의 36세기를 의미한다.
속죄한 사람들은 차후에 자기진아를 깨친 사람으로 태어난다고 한다.
그들이 기분좋게 뿌려서 아들이 태어날 때에 이런 이유를 붙힌 것이다.
진아 깨달음에 대한 영광에 대해서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의 삶이란 것이 진아깨달음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성취되면, 참으로 모든 것이 가치가 충만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 여건은 계속 주어져 있었다.
예를 들어 900만개의 별들이 있지만 그것은 단순히 밝게 반사된 달같은 것일 뿐이다.
해가 빛나고, 비가 내리는데, 그 이유는 단순히 부라만을 아는 이(절대)가 있기 때문일 뿐이다.
그것은 그 아는 이를 (깨치게 하기)위하여 나타난 것이다.
그러므로 부라만을 아는 이의 은혜라는 것은 한계가 없다.
그래서 불사신(不死神)의 위치에 있을 뿐 아니라, 그는 또한 전지전능한 왕좌의 자리를 얻는다.
지금 일어나는 일은 일어나게끔 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든지 진행되는 것은 그렇게 진행되면서도,
마지막 의심은 뿌리채 몽땅 뽑히게 된다.
우리는 얼마동안 살아 가야만 한다.
우리는 기쁨 속에서 즐거운 나날들을 보내다가,
얼마후에 이 육체는 침대나 맨땅 위에서 죽게 된다.
다이아몬드가 묻혀 있는 곳이 어디든 상관없이 그것이 빛을 낸다는 것은 확실하며,
그것이 손에 들려 있을 수도 있고, 목걸이로 걸려 있을 수도 있고,
눈알 속에 있을 수도 있다.
부라만 형상안의 절대자는 어떤 상황 하에서도 지복과 함께 그대로 남아서 함께 있을 것이다.
그런 확신이 흔들리지 말아야만 한다.
만일 진리 위에서 그런 확신이 확고부동하다면,
비록 지성적인 길을 가고 있을지라도 굳건하여 흔들림이 없을 것이다.
진아지(절대깨달음)를 그안에 지니고 있는 육체는 필연적으로 깨달음의 빛을 발하게 된다.
그러나 "나는 실재하는 신이다. 나는 전체적으로 편재하고 있는 신이다"라는 강력한 확신이
서 있어야만 한다.
지금까지 성취되어 왔던 것들은 당연히 오늘도 그 모든 것이 성취될 수가 있는 것이다.
-Amrutla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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