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7. 10. 10:55ㆍ성인들 가르침/노자도덕경
[원 문]
(곽점죽간본)
絶學亡憂 唯與呵 相去幾可 美與惡 相去可若
절학망우 유여가 상거기가 미여악 상거가약
人之所畏 亦不可以不畏(人)
인지소외 역불가이불외(인)
--------------------
(왕필본)
荒兮 其未央哉
황혜 기미앙재
衆人熙熙 如享太牢 如春登臺
중인희희 여향태뢰 여춘등대
我獨泊兮 其未兆 如嬰兒之未孩
아독박혜 기미조 여영아지미해
僂僂兮 若無所歸
루루혜 약무소귀
衆人皆有餘 而我獨若遺
중인개유여 이아독약유
我愚人之心也哉 沌沌兮
아우인지심야재 돈돈혜
俗人昭昭 我獨昏昏
속인소소 아독혼혼
俗人察察 我獨悶悶
속인찰찰 아독민민
澹兮 其若海
담혜 기약혜
飂兮 若無止
료혜 약무지
衆人皆有以 而我獨頑似鄙
중인개유이 이아독완사비
我獨異於人 而貴食母
아독이여인 이귀식모
[해석]
<곽점 죽간원본>
학문을 끊어서 망상이 사라지면,
"네"하는 긍정과 "아니오"하는 부정의 상대적인 두가지 다른 견해는
서로 그 차이가 없어져서 가까워 질 수가 있는 것이고,
아름다움과 추악함이라는 상대적인 두가지 다른 개념도
서로 그 차이가 없어져서 같은 하나로 될 수가 있소.
(이 하나가 되는 것을)
사람들이 꺼려 하는데,
모든 이에게 두려움 없도록 사람들을 인도하기는 불가능한 것 같소이다.
----------------------------
<백서,왕필본의 추가된 덧글>
모호하기는 하지만,
이 아래 글들은 궁극적인 도인의 경지에서 비롯된 체험은 아니오.
세상사람들은 모두들 즐거워하며 (밖으로만 마음을 향하고 있고)
큰 소를 잡아 잔치를 벌린 것처럼 (떠들석 하며)
봄날에 누각에 올라 즐거워하며 (마음이 들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홀로 머물러서 아무런 기척도 없이,
마치 아직 웃을 줄도 모르는 간난아기처럼 가만히 앉아있네.
(내면 속에) 굽혀져 잠겨 있으니.
돌아갈 곳이 없는 것 같구나.
사람들은 모두들 여유만만해 보이는데
나만 홀로 잃어버린 듯 하네.
내가 바보스런 마음이 되어 버린 것인가?
혼돈스럽구나.
세상사람들의 표정은 밝고 밝은데,
나만 홀로 어둡고 침침하구나.
세상사람들은 똘똘하게 잘도 살펴 보는데,
나만 홀로 멍청하고 어리숙하네.
(내면 속은)넉넉하기가 마치 무한한 바다와 같은데,
옴- 옴-하는 바람 소리는 끊어짐 없이 이어지는 것 같네.
사람들은 모두가 실속들을 갖추고 있는데,
나만 홀로 미련하고 쓸모 없이 천한 존재같네.
나는 오로지,
사람들이 쫏아다니는 외면적인 것과는 다르게,
만물을 길러주는 내면의 근원만을 귀하게 여길 뿐이네.
[해설]
이 도덕경 20장은 두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읍니다.
윗부분은 곽점본과 백서,왕필본이 공통으로 되어 있지만,
아랫부분은 곽점본에는 없고, 백서본과 왕필본에만 추가로 덧붙혀져 있읍니다.
원래 곽점본에는 윗부분만 간단하게 기술되어 있었는데,
백서본 형성시기에 어떤 구도자가 자기의 체험을 그 밑에 덧붙혀 놓은 글들이 계속 전승되어 20장 전체를 구성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러다 보니 후세의 주석가나 해석자들이 이 20장을 한사람의 노자가 작성한 것으로 여겨서 도덕경 전체 내용 중에서 가장 노자의 개인적인 인간성을 드러낸 내용이라고 평해 왔지만,
곽점본이 발굴되어 발표된 뒤로는 후반부는 원노자가 아닌 후세에 덧붙혀진 글이라는 것이 판명된 것이죠.
그런데도 계속 주석가나 해석자들은 20장 전체를 한 사람의 노자가 작성한 것으로 해석들을 해 왔읍니다.
여기서는 20장을 상부와 하부로 나누어서 해석을 하고,
기존의 해석서들의 번역내용에 상관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새로운 해석을 해 보았읍니다.
새로운 관점에서 기존 해석 내용들과는 많은 차이점을 볼 수가 있을 겁니다.
전반부의 내용은,
학문을 끊어서 분별망상이 사라지면,
긍정과 부정, 미와 추악이나 선과 악 같은 이분법적 분별사고가 사라져서 의식이 하나가 되는데,
보통사람들은 이렇게 이원적인 분별력이 사라지는 것에 겁을 먹고는
도를 닦으며,학문을 끊으려하지 않아서,
모든 사람에게 도를 가르쳐 주기는 불가능하다는 내용입니다.
후반부는,
백서본 형성시기의 한 구도자가 수행중의 자기 체험을 보통 속세사람의 삶의 자세와 비교해서 개인적 체험내용을 기술한 것인데,
이 수행자의 체험상태에 대한 묘사내용으로 보아서는 도의 절대본체에 도달한 도인이라기 보다는,
깊은 내면에 들어가 있지만,육체의 개인성을 많이 벗어나서 전체의식에 잠겨 있는 일시적인 유상삼매정도의 체험을 하고 있는 높은 경지의 수행자라고 인것 같읍니다.
수행자로써는 무척 깊은 경지라고 할 수 있는 단계이지만, 근원에 안정되어 있는 상태는 아직 아닌 것 같이 여겨집니다.
"나(我)"라는 말이 나오고, 남들과 자신을 비교하는 묘사라든가, 자신의 체험상태를 재음미하여 말하는 것은 아직도 이원적인 의식의 대상에 사로잡혀 있다고 볼 수가 있겠죠.
그러나 이런 수행자의 경지까지 도달하는 사람도 아주 희귀하기 때문에 이글 속에 있는 여러가지 체험내용은 여러 구도자들에게 참고가 많이 되겠읍니다.
결국은 마지막 결어로써 보통 속세사람들은 외부의 대상적인 물질과 욕망 등에만 관심을 가지고 그런 외면적인 것에만 의지해서 살아가지만, 그런 외면적인 삶과는 달리 구도자는 오직 홀로 내면의 전체근원인 도의 본체만을 귀중하게 여기며 살아간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읍니다.
전반부의 원문은 곽점죽간본을 기준으로 해석을 했으며,
후반부는 왕필본의 원문으로 해석했읍니다.
전반부 원문을 곽점본으로 택한 것은 백서본이나 왕필본보다는 글자가 변형이 덜 된 노자 원본에 가까울 것이라는 판단에서 곽점으로 선택했읍니다.
후반부는 백서본과 왕필본이 글자 몇자만 다르기 때문에 그대로 왕필본 원문으로 해석해 보았읍니다.
絶學亡憂; 학문을 끊으면 근심이 없어진다.
絶;끊다,단절하다. 亡; 망하다,죽다.없어지다. 憂;근심,걱정,고통
학문은 이원적인 개념를 배우며 연구하여 지식을 쌓는 것이고,
道란 기존에 쌓은 이원적인 지식을 비워내고 아무런 고정개념도 없는 일원적인 상태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이원적이며 개념적인 학문을 끊음으로써 밖으로만 향하는 대상과 개념에 대한 분별심이 내면으로 향하게 함으로서 마음의 흐름이 고요해 집니다.
따라서 외부대상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어 자연히 분별심이 없어져서 사고작용인 망상과 근심걱정도 사라지겠죠.
여기서 憂는 근심걱정을 의미하지만, 단순히 근심뿐만 아니라 분별적인 사고,망상,생각,상상,회상등 모든 마음의 움직임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愚는 근심과 기타 마음에 나타나는 모든 분별망상이라고 볼 수 있읍니다.
그러나 구도자 입장에서는 무조건 개념적인 이론이나 경전학습을 끊어 버리는 것은 아니고, 구도초기에는 기본적인 개념과 철학이론을 공부해야 겠지요.
구도자들이 경전이나 이론공부를 완전히 끊는 단계는 모든 이론과 경전공부를 이해한 다음에 기본적인 수행자세가 안정되고, 그 수행체계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안정된 이후에 본격적인 구도수행의 행위로 들어갔을 때에 해당되는 것이죠.
입문자는 수행의 방향과 길을 제대로 파악하고,목표에 대한 신심을 확고하게 다지기 위해서 이론적인 공부로써 기초바탕을 굳건하게 다져야 되는 필수과정이죠.
학문을 끊을 정도의 수행단계는 무척 깊은 내면에서 일여내관(一如內觀)의 수행을 하는 단계에 해당됩니다.
이단계에서는 의식을 내면으로 향해서 안정된 상태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경전이나 이론적인 개념에 관심을 두면 마음의 흐름이 산란해져서 내면으로 의식을 집중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심오한 경전이나 이론이라도 일단 구도수행중인 자가 그런 이론이나 개념을 보게 되면 의식의 중심이 외부로 흩으러져서, 그 이후의 수행에서 한동안 마음이 집중이 안되며, 이러한 비안정 상태에서 자칫 구도자는 마음에 분별심과 상념들이 더욱 활개를 치면서 점점 불안정한 활동성을 야기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나 구도자가 어느 경지에 들어가게 되면 저절로 경전이나 이론적 개념에 대한 앎의 욕구가 사라지는 시기가 올 수도 있읍니다.
그렇기도 하지만 어떤 수행조직 안에 있는 구도자가 만일 깨달았다 하드라도,
예를 들면 불교수행체계 같은 곳에 소속되어 있는 구도자들은 그 조직의 후배양성을 위해서 스스로 학문체계를 다지지 않을 수가 없는 입장이 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완전하게 익히기 전에 스승으로서의 의무를 이행하기 위하여 궁극적인 해탈에 안주하지 않고 완전한 해탈을 바라지도 않고, 스스로 자신을 낮추어서 학문을 익히며 제자들을 가르쳐 주는 분들도 계시죠.
학문의 구조는 아는자와 아는 대상의 두가지로 나누어져 상대적으로 분별하는 의식상태죠.
그래서 아는자인 에고적인 나를 주체로 여기면서 여러가지 대상적인 개념을 이해하는데, 그 이해하는 과정이 바로 대상에 대한 분류, 분별, 즉 옳고 그름, 좋고 나쁨, 좋아하고 싫어함, 천하고 귀함, 등으로 쌍대성과 이원화된 개념들을 갈라서 분석하고 그 결과를 분별력으로 의식에 각인시키는 것이죠.
따라서 그러한 분별의식으로 인해 갈등과 특정개념의 선택으로 의식 속에서 분류되고 갈라져서 개별화되어 일어나기 때문에 사고작용이 왕성해지고 항상 의식이 끊임없이 꼬리를 이어가면서 움직이며 분별작용과 망상을 일으키죠.
더욱이 그러한 분별작용은 외부를 향해서 관심을 키우는 의식의 외향적 움직임을 가속시킬 뿐만 아니라, 주체로 잘못 착각하고 있는 에고성의 나를 더욱 강력하게키우는 에너지를 공급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이원적 분별,판단 작용이 바로 노자가 보는 근심걱정,사고, 망상,생각을 말하며, 그런 학문을 끊으니 분별망상이 사라진다는 말이 바로 절학망우라는 네글자 뜻입니다.
왕필본은 絶學無憂라고 되어 있는데, 無자나 亡자는 똑 같이 사라진다. 없어진다는 의미로써 해석상은 같은 의미의 단어입니다.
이 絶學亡憂라는 구절을 기존의 주석서들은 아래문장들과는 의미가 전혀 통하지 않는다고, 잘못 끼어 들어온 문장이라고들 말하는 학자들도 많읍니다만, 아래문장들의 정확한 해석 여하에 따라서는 아주 조화로운 문장으로 해석이 될 수있다고 봅니다.
唯與呵 相去幾可 ;긍정과 부정은 서로 상쇄되어 가까워질 수가 있다.
唯;"예"하고 공손이 대답하는 말, 긍정. 與; 더불어,~와,과. 呵; 꾸짓다,헐뜯다.부정
相;서로. 去; 없애다,멀어지다.제거하다.풀다,줄이다. 可; 가히 ,~될수있다.
幾;기미,낌새,가까워지다.다하다.끝나다.
唯與呵에서 呵는 원래 곽점죽간본의 글자모양이 可자 였으나, 발굴후에 학자들의 연구결과 呵자로 판독한 것이죠.
여기서는 그呵자를 그대로 적용해서 해석해 보겠읍니다.
唯는 대답할 때에 "네"하고 공손하고 대답하는 말로써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자세를 표현한 것 같읍니다.
呵는 꾸짓다,헐뜯다,라는 부정적이고 거절하는 자세를 표현한 것이며,
따라서 唯와 呵는 "네"하는 긍정과 "아니오"하는 부정적인 상대성을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가 있읍니다.
학문의 논리적 특성은 옳고 그름, 정과 역, 정상과 비정상,수용과 거부,등 이원적인 상대성 개념을 나누어 분별하면서 특정개념조직으로 구성되면서 체계화하여 두뇌 속에 각인되는 것이죠.
따라서 여기서는 학문의 특성인 긍정과 부정의 분별작용에 대해 표현한 것으로 보겠읍니다.
相去幾可는 원래 곽점본의 글자인데, 전문학자들이 可를 何로 판독하여 의문문이라고 해석했읍니다만,
여기서는 원래 원본 글자 그대로 可를 가지고 해석을 해 보았읍니다.
왜 기존 해석서대로 의문문 형태로 해석을 하지 않았느냐 하면, 앞에 학문의 특성을 이야기하고자 하는데 구태여 의문문 형태를 취하지 않았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또한 의문문형태로 해석을 하면 명확한 의미연결이 잘 이어지지가 않읍니다.
相去; 서로 (상쇄되어)없어지다. 幾可; 가까워질 수가 있다.
相去幾可 ; 서로간에 차이가 없어져서 가깝게 될 수가 있다.
두문장을 합쳐서 해석하면,
"네"하는 긍정과 "아니오"하는 부정은 서로 차이가 상쇄되어 가까워질 수가 있다.
옳고 그름, 선과 악,미와 추악이라는 두개의 반대되는 개념은 객관화된 대상을 쌍대성으로 분별한 결과이죠.
그렇게 둘로 나누어 분별하는 마음은 주,객이라는 이원적인 마음에서만 나타날 뿐이며, 마음을 넘어서 내면속에 안정되어 있으면 주,객이라는 이원화상태는 나누어지지 않읍니다.
내면으로 들어가려면 첫째는 나라는 개인적인 정체성이 사라져야 되는데
나라는 정체성은 바로 자신이 육체라고 여기는 데서 한개체가 분리되어 나타난 듯이 보이는 것이죠.
따라서 자기가 전체와 별도로 떨어진 개체에고라는 정체성을 버리기 위해서는
육체가 자기가 아니라는 동일성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이렇게 육체 동일성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바로 내면으로 주의를 주어 자신의 옳바른 원래 본성을 탐구하는 것이죠.
내면으로 들어가 깊은 의식의 근원에 안정되면 자연히 이원적인 마음이 사라지고 전체가 나라는 깨달음이 오는데, 이상태에서는 옳고 그름, 선과 악,미와추 같은 쌍대적 분별의식도 저절로 사라지는 것이죠.
노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궁극적 내면을 탐구하여 거기에 안주함으로써
모든 상대성을 제거하라는 말씀입니다.
단순히 학문을 끊으라는 말씀이 아니고, 궁극적인 도를 깨치기 위해서 분별작용을 없애고 무위적인 전체적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왕필본은 唯之與阿;예(공손한 대답)과 응(적당히 느리게 대답하는 것)
相去幾何; 서로간의 차이가 얼마나 되는가?
이렇게 해석들이 되어 있는데, 앞의 문장인 절학무우하고도 연결이 안되고,
어떤 뚜렷한 의미가 매끄럽게 전달이 잘 안되고 있읍니다.
美與惡 相去可若;
아름다움과 추악함이 서로 상쇄되어 같아질 수가 있다.
美; 아름다움, 惡;악하다,추악하다. 若;같다. 可: ~될 수 있다.
이 문장도 원래 곽점본은 相去可若인데, 전문학자들이 可자를 何자로 의문문으로 판독하여 지금까지 모든 해석서들이 의문문으로 해석해 왔읍니다만,
여기서는 원래 본글자인 可 그대로 해석해 보았읍니다.
왕필본의 경우는 善之與惡 相去若何 ; 선한 것과 악한 것은 그 차이가 얼마나 되는가?
라고 해석이 되었는데, 일원적인 도의 입장에서 선과 악의 차이가 얼마나 되느냐고 반문하는 형식인데, 선과 악이라는 서로 다른 상대성 개념은 단순히 이원적인 의식상태의 일시적인 개념적 상태라는 것이죠.
그러나 이런 의문문식 해석은 명확한 노자의 메세지를 파악하기가 일원적인 상태를 파악하고 있는 사람외에는 일반사람은 이해하기 어려운 해석입니다.
人之所畏 亦不可以不畏(人);
(이것을)사람들이 꺼려 하는바,
모두가 두려워하지 않게 사람들을 지도하기에는 불가능한 것 같다.
所; ~바. 畏; 겁내다,싫어하다.꺼리다. 亦;~또한, 다만~뿐. 모두. 以; 인솔하다,이끌다.
人之所畏; 사람들이 (이것을) 두려워(꺼려)하는 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꺼리는 대상인 목적어"그것"이 생략되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그 앞의 문장에서 설명한 학문을 끊어서, 긍정과 부정을 없애고, 아름다움과 추악함의 차이를 서로 상쇄시켜서, 이원적인 쌍대성을 하나로 같아지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좋고 싫은 것을 없애서 같게하고, 美와 惡의 분별을 없애는 것을 사람들이 꺼려하고 두려워한다 말이죠.
그렇게 좋고 나쁜 것, 선과 악을 분별하지 못하면 일반 보통사회에서 바보취급을 받을까 보아 그렇게 무분별상태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꺼려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문장에서 그 목적어를 생략하는 통에 후대에 사람들이 이문장에서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해석이 잘못되어 전승되어 내려온 것 같읍니다.
亦不可以不畏; " 모두가 두렵지 않게 사람들을 지도하기에는 불가능하다"
이렇게 해석 되는데, 전체 사람들에게 일원화되어 무분별의 무위적인 삶을 사는 것을 억지로 가르쳐 주기는 불가능하다는 의미라고 볼 수 있읍니다.
이 이야기는 노자가 어떤 왕이나 지도자에게 충고를 주는 내용인 것 같읍니다.
이부분의 문장들은 모든 해석서들이,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나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렇게 해석들을 했는데,
여기서,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대상(목적어)이 무엇인지 애매 모호하고,
"나"라는 글자가 없는데도 "나"를 삽입해서 이 20장 전체문장구조가 이문장때문에 완전히 뒤바꿔져서 잘못 전달되고 있는 것 같읍니다.
이런 해석 내용이 백서본 개작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전송해서 내려 온 것 같읍니다.
이렇게 새로운 관점에서 해석을 해 보니,
맨 위의 문장인 "학문을 끊으니 근심이 없어진다"는 문장이 전체적으로 물 흐르는 듯이 조화롭게 연결이 되고,
곽점본 원노자의 메세지 말씀내용이 제대로 명확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 같읍니다.
다른 전통적 주석서나 기존의 우리나라 번역서들을 보면 이 부분에서 도데체가 무슨 주제로 무엇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인지 종잡을 수 없는 내용으로 번역되어 있죠.
문제는 이 뒤에 이어져서 연결된 문장들 때문에 20장 전체가 완전히 이상한 내용이 된 것입니다.
뒤에 연결되어 있는 문장은 곽점 죽간본에는 나타나지 않고,
백서본과 왕필본에만 추가된 문장인데, 추측하건데 노자를 공부하는 어떤 구도자가 문장이 너무 짧으므로 나름대로 내용을 연결하여 자기체험을 묘사한 것 같은데, 위의 곽점본 문장을 아마도 잘못해석하고 이해하여 덧붙힌 문장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이 원래 곽점본 문장과 그 뒤의 백서본,왕필본에 덧붙혀진 추가 문장들은 그 내용과 전달하려는 메세지 주제가 전혀 다른 것으로 처음 발굴후에 각장을 분장하는 사람이 잘못 분장을 했던가, 아니면 곽점본의 원문 밑에 누군가가 공부하면서 메모형식으로 착어한 것이 그대로 전송되어 내려온 것 같읍니다.
-------------------------------
(백서본,왕필본 추가 삽입분)
荒兮 其未央哉 ;
모호하긴 하다만,
이하의 글들은 궁극적인 도인의 경지에서 비롯된 체험은 아니오.
荒;거칠다,덮다,넓다,흐릿하다,모호하다. 未;아니다,장차 央;가운데,다하다,없어지다.오래다.
哉;어조사,비롯되다,처음,재난.
荒자는 황량하고 넓다는 의미가 있으나, 의식적인 측면에서 애매모호하고 흐릿하다는 의미도 있읍니다. 흐릿해서 명확하게 잘 알수가 없다는 의미의 말 같읍니다.
其는 그 아래문장을 말하며,현재 자기 의식의 체험상태를 가리키는 것 같읍니다,
이후에 말하는 여러가지 세상사람들과 자신의 상태와의 비교에 여러가지 체험에 대한 내용의 글을 其(이것들)로 표현한 것 같읍니다.
未는 '아니다'라는 의미이고, 央은 '중심부' 또는 '가운데'라는 의미가 있는데, 이는 바로 도의 절대 본체 또는 도덕경 원래저자인 노자같은 도인의 경지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哉는 '비롯되다' 또는 '처음'이라는 의미가 있읍니다.
따라서 未央哉는 의식넘어 도의 본체인 의식중심으로 부터 비롯되는 체험이 아니다.라는 것을 묘사한 것 같읍니다.
구도자가 깊은 내면의식 속으로 들어가면 의식의 중심이 전체로 넓게 펼쳐져서 일상생활에서는 오히려 정신이 흐릿한 체험을 갖을수도 있게 됩니다.
외부의 대상에 대한 분별이 흐릿해지고 세상 모든 것이 꿈 속처럼 실제성이 없는 체험상태가 오는데, 이상태는 궁극적인 절대본체로 넘어간 것이 아니라, 그 이전의 존재의식의 입구에 가까이 접근된 空의식 경지라고 할 수가 있읍니다.
즉,그전까지는 육체와 마음을 자기라고 여기던 육체 동일시에서 오직 전체의식이 자기라는 의식과의 동일시로 전환된 것이죠.
이상태에서는 세상과 자기가 하나라고 여겨지기 때문에 감각지각작용에 의해서 형성된 세상의 온갖 다양한 삼라만상의 경계를 무시하게 되고, 오직 의식과 하나가 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그 나라는 전체의식도 아직은 절대 본체에 이른 상태는 아닙니다.
아직 나라는 존재의식이 남아 있고, 따라서 의식의 경계선을 들락날락하는 불안정상태에 있읍니다. 그러나 바로 최종 본체의 입구에 접근되고 있는 상태라고 볼 수 있겠읍니다.
최종 절대 본체란 이 나라고 여기는 의식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를 말합니다.
따라서 조금이라도 "나"라는 느낌이나 의식이 있다면 아무리 신비한 체험을 겪더라도 아직 절대본체에 이르는 것은 요원한 것이죠.
이 백서본에 글을 쓴 구도 수행자가 사전에 원래 노자의 글밑에 자기 글을 첨부하면서 솔직하게 이글은 도의 본체인 중심에서 나온 체험이 아니라는 사실을 맨처음 앞문장에 명확하게 알려주는 내용입니다.
이 한문장으로 보아도 이문장 이후의 글들은 곽점본의 원노자 글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이 확실하게 밝혀지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대부분의 주석서와 해석서들은 이부분에 대한 해석을 다른 의미로 해석함으로써 그 원래 내용이 많이 다르게 변형되어 버린 것 같읍니다.
따라서 이 도덕경 20장의 전체내용은 곽점본 원노자와 백서본 형성시기의 수행자 두사람이 쓴 글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판단 할 수가 있읍니다.
대부분의 주석서와 해석서들은 이 20장이 노자의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나서,
도덕경 중에서 가장 인간적 친근감을 보이는 특이한 글이라고 평하는데,
실은 노자 도인과 아직 완벽한 도인이 안된 수행자인 두사람의 글을 혼합해서 마치 한사람의 노자를 인간적인 면과 도인의 양면성을 느끼게 된 것이죠.
원래 궁극에 이른 도인은 인간적이라기 보다는 보편성 또는 자연성이죠.
따라서 도인은 비인격적이며 인간적인 사사로운 감정이 없는, 보편적 존재입니다.
그러나 궁극을 이루지 못한 수행자는 어쩔 수 없이 인간적 감성과 개인적인 감정이 남아 있을 수 밖에 없읍니다.
물론 일반 사람들이 개인적 관점에서 외면적으로 보아서는 절대 도인과 수행자의 차이를 알 수가 없읍니다.
오히려 도인이 보통 사람보다 더 나약해 보이고, 인간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보이지 않는 내면은 완전히 비 인격적이며, 보편적이고 자연성의 있는 그대로를 지켜보기만 하는 주시자일 뿐인 것이죠.
衆人熙熙 如享太牢 如春登臺;
衆人熙熙;세상사람들은 모두 즐거워하며 (밖으로만 마음을 향한다.)
如享太牢; 큰 소를 잡아 잔치를 연것 같고(떠들석 하며)
如春登臺; 봄날에 누각에 올라 즐거워하며(마음이 들떠 있는 것 같은데)
자신은 마음이 내면 속에 들어가 있어 흐릿하고 아무 생각도 없이 멍한데,
밖의 세상사람들은 여러가지 대상에 사로잡혀 즐거워하고 떠들석하게 잔치를 벌리는 것처럼 마음들이 밖으로만 향해 들떠 있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죠.
我獨泊兮 其未兆 如嬰兒之未孩
我獨泊兮;나는 홀로 머물러서, 泊;배를 대다.
其未兆; 아무 기척도 없이, 兆;기미,조짐.
如嬰兒之未孩; 마치 간난아이같이 아직 웃을 줄도 모르고,
자신이 내면 속에 몰입되어 꼼짝 않고 있는 모습을 묘사한 것입니다.
나는 내면 속에 홀로 머물러서 아무런 생각이나 느낌도 느끼지도 못하고,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두어달 지난 간난아이처럼 웃을줄도 모르는 마음상태를 묘사한 것이죠.
수행이 깊어져서 내면 깊은 곳에 잠겨 있을 때의 상태를 다른 사람들이 외부 감각대상들에만 관심을 주는 것과 비교해서 표현한 내용입니다.
僂僂兮 若無所歸;
僂僂兮;(내면속에)꼼짝못하게 묶여있으니.
若無所歸; 돌아갈 곳이 없는 것 같다.
루루헤는 僂가 "굽다,곱사등"과 같은 안으로 접혀져 있는 상태를 의미하므로
내면속으로 완전히 접혀서 묶여 있어 꼼짝 못하는 상태를 묘사한 것입니다.
대개의 해석서는 '고달프고나'라는 의미로 해석들을 했지만,
여기서는 뒤의 -돌아갈 곳이 없는 것 같다,-라는 내용에 맞추어서
" (내면 속에) 꼼짝 못하게 묶여 있으니"라고 해석을 했읍니다.
구도자가 내면 깊은 곳에 완전히 잠겨 있어 꼼짝 할 수가 없는 상태입니다.
衆人皆有餘 而我獨若遺
衆人皆有餘; 사람들은 모두가 여유 있어 보이는데
而我獨若遺; 나만 홀로 버려진 것 같구나.
遺;잃다,남기다,끼치다,버리다.
다른사람들은 자유롭게 대상들을 따라 쫏으며 활기있고 여유있게 사는 것 같은데,
내면속에 파묻혀 혼자서 꼼짝 못하고 앉아 있는 것이 모든 사람으로부터 이탈되고 버려져서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 같다는 묘사입니다.
나는 모든 바램이나 욕구를 잃어 버린 것 같다는 묘사입니다.
我愚人之心也哉 沌沌兮;
我愚人之心也哉 ;나는 바보의 마음이 되어버린 것인가?
哉;감탄하거나 탄식하는 투의 말끝에 붙는 어조사인데,
여기서는 의문문 형식의 탄식형 문장으로 묘사했읍니다.
아무런 욕망도 없고 바라는 대상도 없으니 사람으로써 바보천치가 된 것이 아닌가?하는 자탄의 묘사법이지만,실은 인간적인 욕망이 전부 사라진 상태를 강조하기 위한 문장이죠.
沌沌兮; 혼돈스럽구나.
沌;엉기다,어둡다,묶이다, 등의 뜻이 있는데, 어둡고 엉클어진 마음상태로써 마음이 혼돈스러움을 묘사한 것이죠.
도를 닦는다고 수행을 했는데, 내면 속으로 깊히 뭍히니, 마음은 온통 여유없이 꼼짝 못하는 답답함 속에서 있고, 바램도 느낌도 없으니 도를 구하려다가 오히려 바보가 되는 것이 아닌가,하며, 판단이 헷깔리고 혼돈스럽다고 말하고 있읍니다.
그런데 구도자가 내면 속으로 들어가면 이렇듯 바보스럽고 멍청하며,활동적이 되지 못하는 단계를 넘어가야죠.
선불교조사들이 흔히 말하는 천길 낭떨어지 암벽에 바싹 붙어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리지도 못하여 꼼짝달싹 못하고 있는 상태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겠읍니다.
이러한 경지를 겁을 내는 것이 바로 맨위에서 곽점본 원노자가 말씀하시는 人之所畏 亦不可以不畏(사람들은 이것을 겁을 내는 바, 모두가 겁이 없도록 지도하기에는 불가능하다)라는 구절입니다.
이렇게 깊은 내면에 들어가는 과정에 끝도 모를 깊은 구덩이와 바보같고 죽은 통나무같은 의식상태를 넘어가서 초월하면 어둠(깊은 잠)보다도 더 깊고, 빛(생시)보다도 더 밝은 절대본체에 이르는 것이죠.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암흑의 의식지대를 통과하지 못하는 것이죠.
이 문장을 쓴 백서본의 수행자도 아직은 절대본체에는 다달으지 못했지만,
마치 바위 속에 꼭 박혀 있는 수정알처럼 또는 만길철벽 가운데 붙어서 꼼짝 못하고 있는 것처럼,높은 의식상태로써 나라는 존재가 사라지는 존재핵점에 가까이 접근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俗人昭昭 我獨昏昏
俗人昭昭;세상사람들의 표정은 밝고 밝은데,
我獨昏昏; 나만 홀로 어둑침침하네.
세상사람들의 표정은 활기 있고 밝아 보이는데,
나만 홀로 어두운 내면 속에서 아무것도 모른채 잠겨 있다는 묘사입니다.
俗人察察 我獨悶悶
俗人察察 ; 세상사람들은 똘똘하게 잘 살피는데,
我獨悶悶 ;나만 홀로 어둑하고 멍청하게 있네.
세상사람들은 밖의 온갖 대상들을 바쁘게 쫏아 다니느라고 이것 저것 똘똘하게 살피며 분별을 잘 하는데,
나만 혼자서 내면 속에서 전체가 하나로 되어 세상의 경계들이 없어진 어둠의 상태에서 멍청하게 분별력조차 없이 앉아 있다는 묘사입니다.
澹兮 其若海 ;(내면 속은)넉넉하기가 마치 무한한 바다와 같도다.
澹; 넉넉하다.맑다,고요하다. 담담하다.
내면의식은 넓직하고 여유가 있는 것이 마치 무한한 바다 속과 같다는 것이죠.
물론 내면의식도 미세한 파동작용이 있읍니다만, 그 미세한 파동 중심 속에 공진되면 전체 경계가 사라진 단일 파동의식이므로 전체가 하나이며 무한합니다.
의식의 대상적인 움직임이 없어서 이원적인 경계가 전혀 없는 상태로써 마치 바다처럼 무한하고 고요합니다.
이 부분은 마치 진공묘유(眞空妙有)에서 의식의 본체인 眞空적인 측면을 묘사한 것 같읍니다.
즉, 의식이 가지고 있는 道의 본체인 空측면을 말한 것이지요.
飂兮 若無止; 옴- 옴-하는 바람소리는 마치 그끝이 없는 것 같도다.
飂는 바람부는 소리,부는 바람의 움직임을 의미합니다.
보통 바람부는 소리는 윙윙-하는 진동음이죠.
내면의식에서 바람부는 소리라는 것은 존재의식의 순수파동의 회전움직임을 윙윙하는 바람소리라고 묘사한 것인데, 이것은 고대 인도로 부터 전통적으로 "옴- 옴-"이라는 존재의 기본 진동음이라고 알려져 왔읍니다.
실질적으로 뇌의 중앙에서 발생하는 음의 소리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의식이 처음으로 생겨나는 것이 순수한 파동의 발생이라는 사실을 "옴"이라는 소리형태로 형상화 한 것인데,그것은 다른 의미는 없고,
단순히 이 존재의식이 "파동성"이라는 것을 상징하는 소리입니다.
그러나 그 바람소리라는 것이 보통사람이 느끼는 귀의 이명(耳鳴)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도덕경 수행자가 들은 그 바람소리라는 것이 바로 내면에서 울리는 "옴, 옴-"이라는 의식의 진동소리로 표현했읍니다.
이 "옴" 소리는 세계 각지역마다 그 의성어적인 면에서 조금씩 다른데, 우리나라의 "엄마,맘마", 기독교에서의 "아멘" 북유럽의 신 "오딘" 이스람교의 "알라"등등 세계 각종 종교나 신화에 등장하는 최고신의 명칭이 대부분"아" "오,어" "움"의 소리가 조합되어 신의 이름이나 주문,진언이 구성되고 있읍니다.
티벳 불교에서 나온 진언인 "옴 마니 반메 훔"도 "옴"을 기준으로 한 인도의 흰두교 진언의 형식에서 파생되어 나온 것이죠.
이 기본존재의식의 파동성을 소리로 의성화된 말이 바로 신의 이름으로 그대로 칭송되어 온 것이 현대까지도 전해내려 오고 있으며, 또한 고대인류역사의 신화나 종교등에서 그 흔적들을 많이 볼 수가 있읍니다.
바로 이기본 진동음이 의식의 파동성 또는 존재의식 발생이 파동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소리파동으로 상징해 주는 것이죠.
이글에서도 바람 소리란 바로 오염이 안된 순수의식의 파동성 움직임을 소리로 표현한 것입니다.
중심의식자체는 하나의 단일 파동상태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돌고 돌면서 멈추지를 않죠.
이 기본적인 순수존재의 기본파동이 육체의 각 기관에 분산되어 현상세계의 각종 경계와 색갈을 구분하여 만들어 내고, 에고적 "나라는 느낌"도 이러한 순수의식의 파동이 3차적으로 변형되어 각인된 상태를 말하는 것이죠.
의식의 파동이 멈춘다면 그것은 바로 절대본체상태입니다.
그러나 위에서 넉넉하여 바다같이 무한하다고 표현한 것은 그 의식의 파동 중심 내부에서는 전체가 무한한 공진상태에 있으므로 마치 담담하기가 바다와 같다고 표현한 것 같읍니다.
이부분은 眞空妙有에서 妙有에 해당되는 부분입니다.
道의 작용측면이며 바로 의식의 움직임 양태인 파동성으로 바람소리라고 표현한 것 같읍니다.
衆人皆有以 而我獨頑似鄙
衆人皆有以 ; 사람들은 모두 쓸모가 있는데(실속들을 갖추고 있는데),
而我獨頑似鄙 ; 나만이 홀로 미련하고 쓸모가 없이 천한 존재 같이 보인다.
사람들은 현실생활에서 대상을 상대로 삶을 유지하며 바쁘게 움직이지만,
나는 내면 속에 홀로 머물러 아무것도 않하고 있어서, 이원적인 대상세계인 물질적으로 실용적인 세상에서는 미련하고 완고하여 거의 쓸모가 없는 것 같이 천하게 여겨진다,는 것이죠.
즉, 내면 세계에서 머물고 있는 나는 물질적인 밖의 세상에서는 거의 쓸모없이 천하게 보인다는 묘사입니다.
이현상세계의 물질적인 입장에서 도인을 보자면 현실생활의 실용적인 측면으로 소용이 되는 것은 하나도 없읍니다.
도를 닦으려는 목적이 어떤 물질적인 이득이나 초능력 또는 명예,지성적 학식 등을 얻으려고 한다면 그구도자는 필연적으로 도의 완성은 보지 못합니다.
실지 생활에 어떤 이득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개인 에고성의 욕망일 뿐, 에고성에서 벗어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구도행위와는 전혀 그 길이 다릅니다.
행여나 어떤 개인적 희안한 체험이나 보통인간이 불가능한 능력을 얻어서 남들보다 특출한 사람이 되려고 구도수행을 한다거나, 사회적인 명예를 얻어서 도인으로써 여러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기 위하여 수행을 한다면 일시적인 환상으로써 이러한 목적은 잘못 착각한 꿈입니다.
오히려 실용적인 생활에서는 미련하고 바보같으며 물질적으로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가난뱅이로 살수도 있읍니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전 우주를 가슴에 품고도 여유가 충분하게 남아 있을 정도로 물질적으로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것이 정신적으로 충족되어 충만한 마음을 갖고 있음으로,
말로는 표현 할 수 없고 보이지는 않지만 정신적 부자라고도 말할 수가 있겠읍니다.
我獨異於人 而貴食母
我獨異於인 ;나는 홀로, 사람들이 의지하는 외면적인 것과는 다르게 ,
而貴食母; 만물을 길러주는 도의 근원만을 귀하게 여길 뿐이다.
사람들이 의지하고 있는 것이란 이원적인 대상들, 외면적인 물질,쾌락,욕망등이며, 이러한 외부적인 대상들에 의존해서 삶을 유지해 가고 있죠.
이러한 외면적인 대상이 아니고, 그와는 달리 내면으로 들어가서 일원적인 도의 절대근원만을 소중하게 여긴다,라는 의미입니다.
食母란 우주만물이 그것에서 나오고, 그것을 길러주는 道의 절대본체를 이르는 것이죠.
말하자면, 나타나 보이는 현상세계인 외면에는 관심이 없고, 이 현상세계가 나온 근원인 내면의 절대 진아에만 관심이 있고, 오로지 그것만을 소중하게 여긴다는 마지막 결어입니다.
이번 20장은 좀 특이한 내용이기 때문에 부가설명을 길게 하느라고
비교적 장문이 되어 버렸읍니다.
끝까지 참을성을 가지고 읽으시느라 고생 많으셨읍니다.
戊子年 새해를 맞이하여
가내 평안과 보람찬 결실이 이루어지기를
두손 모아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무한진인-
'성인들 가르침 > 노자도덕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자도덕경22장, 굽히면 온전하게 보전된다. (0) | 2008.07.10 |
---|---|
노자도덕경 21장, 도는 만물의 근원을 거느리며 지켜보고 있다. (0) | 2008.07.10 |
노자도덕경19장, 내면을 지켜보며 꾸밈없이 산다. (0) | 2008.07.10 |
노자도덕경,17,18장, 최상의 도는 자연 그대로 있는 것이다. (0) | 2008.07.10 |
노자도덕경16장, 완전히 텅 비우고 고요함만 지킨다. (0) | 2008.07.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