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도덕경19장, 내면을 지켜보며 꾸밈없이 산다.

2008. 7. 10. 10:51성인들 가르침/노자도덕경

[原文]

絶知棄辯(絶聖棄智)  民利百倍

절지기변    (절성기지)               민리백배

 

絶僞棄慮(絶仁棄義)  民復季子(民復孝慈)

절위기려    (절인기의)                민복계자(민복효자) 

 

絶巧棄利  盜賊無有

절교기리          도적무유

 

此三者 以爲文不足

차삼자        이위문부족

 

故令有所屬  見素抱樸  少私寡欲

고영유소속             견소포박    소사과욕

 

 

[해석]

관념적인 지식을 끊고, 분별적인 논쟁을 버리면,

사람들에게 백배나 이로움을 주게되오.

 

거짓을 끊고, 잔꾀를 버리면,

사람들은 어린아이처럼 순진함을 회복하게 되오.

 

사람들을 매혹할 수 있는 것들을 없애고,이득 취할 만한 것들을 제거하면,

도적들이 있을리가 없소이다.

 

이 세가지는 그 말내용만 가지고는 (직접 실천하는데는) 부족하오. 

그러므로 이것을 실행하기 위하여 함께 주의를 기울여야 할 마음자세가 있으니, 

 

내면의 본바탕을 지켜보며,

꾸밈없이 순박한 마음을 품도록 하고,

 

사사로운 나를 미약하게 하므로써

바라고자 하는 욕망을 줄어들게 하는 것이외다.

 

 

[해설]

 

이번 19장은 왕필본과 백서본의 내용이 곽점 초간본에 비하여 약간 개작된 내용이며, 그 개작 내용의 연유가 유가적인 관념철학을 비판하고자 하는 내용이라고 판단되어,곽점 초간본의 내용을 기준으로 해석을 했읍니다.

그러나 왕필본의 원문도 함께 해석하였으므로 백서본과 왕필본의 개작내용과 곽점본의 개작이전의 원문을 비교해 볼 수가 있었읍니다.

 

이장의 기본적인 내용은,

- 관념적인 지성과 분별논쟁을 없애고,

거짓말과 잔꾀을 버리며,

욕망을 자극하는 기본요인을 없애 버리라.

그러나 이 세가지 사항도 그말 내용만 가지고는 실행하는데 불충분하며,

이러한 지켜야 할 이론적인 실행사항과 함께 항시 유지해야 할 기본 실천자세가 있으니,

자기마음의 내면에 있는 본바탕을 지켜보며,

꾸밈없는 소박한 마음을 지니고 있으면, 

에고적인 나가 점점 작아 지면서 사사로운 욕망이 사라진다- 는 가르침입니다.

 

전체 도덕경 내용 중에서 비교적 소박하고 평범한 가르침 내용입니다만,

백서본이나 왕필본의 경우에는 유가적인 성인군자이념이나 인의사상을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대목이 있었서 곽점본이 출토되기 이전에는 무척 논란이 많았던 부분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곽점본이 발표된 뒤에는 백서본과 왕필본의 일부 개작내용의 의도가 명백히 드러나서 기존의 통행본인 왕필본과 백서본을 주석하는데, 곽점 초간본을 참고로 하지 않으면 정확한 주석에 오차가 날 수 있다는 것이 확인 되었읍니다.

 

그래서 여기서도 내용상 오차가 심하게 개작된 것은 곽점본의 단어를 일부 대체하여 번역을 하였읍니다.

그렇게 해석해야지 노자 도덕경의 원래의 의미에 조금이라도 가깝게 접근할 수가 있는 것이죠.

 

 

絶知棄辯(絶聖棄智)  民利百倍

絶;끊다,단절하다. 棄;버리다,그만두다. 辨;분별하다,나누다, 논쟁하다. 聖;성인,성스럽다.

知;알다,앎.智;슬기,꾀,지혜롭다. 利;이롭게하다,유익하다.이익이 되게하다.

 

絶知棄辯 民利百倍;

지식을 끊고 분별적인 논쟁을 버리면 백성들이 백배나 이롭게된다.

이문장은 곽점 죽간본의 기본형입니다.

는 알음알이 지식을 말하는데,그 앎이란 바로 이원적인 개념적 학문을 말하는 것입니다.

삶의 실질적인 지식이라기 보다 관념적이고 개념적인 지식은 사람의 머리 속에 불필요한 상상과 꾀만을 만들어서 인간사회에서 분쟁의 씨앗이 될 뿐 아니라, 

투쟁의 무기로써 개인성의 방벽을 두껍게 쌓을 뿐이고, 사람의 실질적인 행복한 삶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어 에고를 강화 할 뿐이죠.

이러한 관념적인 철학과 종교적 개념들은 역사이래 오늘날까지 인간 사회에서 국가간,민족간,지역간에 분열과 분쟁의 요인이 되었을 뿐, 인류의 삶에 진정한 행복과 영원한 평안을 가져다 주지는 못했죠.

 

이장에서 노자는 이원적이고 대상적인 관념적 앎을 버리라고 한 것이죠.

어떤 종교적,철학적인 고정관념이 그사람에게 남아 있는 한에는 완전한 깨달음이란 없읍니다.

지성적인 이론으로는 도를 이해하는데 한계가 있으며,

구도수행에 있어서도 어느 경지 이상에서는 이론적인 철학개념은 장애물이 됩니다.

어떤 고정관념이나 알음알이가 머리에 남아있는 한에는 절대궁극의 깨달음에는 도달할 수가 없죠.

그래서 모든 선각자들이 이론적인 알음알이를 벗어나라고 충고하고 있읍니다.

깨달음 수행또는 구도라는 것은 바로 이 지성적 앎으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죠.

 

그런데 좀 묘한 것은 구도자들이 수행과정에서 어느 한계까지는 이론적인 개념을 이해해야 되고, 그 다음부터는 그런 이론적 개념을 다시 전부 버려야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무조건 지성적 알음알이를 배격만 해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현대 과학과 지성의 시대에는 옛날 노자시대사람들과는 달리 엄청난 지성적인 개념지식이 굳어져 있고,

다양한 학문의 개념이 분화되어 세분화 전문화 함으로서,

이러한 단단히 굳은 고정관념들을 풀어서 녹이려고 하면,

일단은 그 기존에 쌓여있는 고정관념들을 풀어지게 하는 도구로써

또 다른 깨달음 법의 이론과 이해를 공부해야 되는 것이죠.

마치 발바닥에 박힌 가시를 뽑아내기 위해 또 다른 가시를 도구로 사용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 도구로 사용했던 가시도 마지막에는 결국 버려야겠죠.

그래서 마지막 깨달음법에 대한 이론도 다 버려야 하는 것이 바로 비이원론적인최상승 수행법들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노자는 있는 그대로 자연 무위적인 최상승의 도 입장에서 모든 알음알이 지식들을 버리라고 하는 것이죠.

 

辯(변)은 분별하고 나누며 따지고, 논쟁하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이러한 따지고 분별하므로서 그것이 겉으로는 그럴듯한 논리로서 번지르하게 말을 잘하는 달변의 능력도 지니게 됩니다. 

이러한 능력을 무기로 이용해서 묘한 논리전개로 사람들을 매혹하고 정복시키는 기술로 자신의 의도대로 사람들을 이끌어 가기도 하는데,

도의 본래입장에서 보자면 자기자신에게나 타인들에게 아주 커다란 허위적 기만행위라고 볼수가 있읍니다.

그런데 요즘 사회는 그런 말 잘하는 사람을 능력있는 사람으로 보면서 지도자로 나서지만,

사실 도의 측면에서 보면 그런 사람들은 허수아비보다도 못한 전체사회를 허황하게 치장하며 해를 끼치는 허깨비 인간들로 볼 수밖에 없읍니다.

노자는 이러한 분별하고 따지며,번지르하게 말 잘하는 것을 집어 치우라고 충고를 합니다.

 

말을 잘하는 사람은 실속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는 요즘 현실에서 정치인들을 통해서 너무나도 실감적으로 잘 느끼고 있죠.

지도자 구룹은 公人들이지만, 사사로운 개인감정과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분별시비하면서도 애매모호한 말을 한마디 던지고, 그것을 언론들이 확대해석하고, 온나라가 떠들썩해지면서,사람들간에 편이 갈라져서 갈등과 혼돈스러운 분위기가 조성되기도 하는데,

이러한 사람들간의 갈등과 혼란스러운 분위기 조성을 지도자 구룹들이 직접 의도적으로 조성하는 사회풍경이 요즘의 현세대 사람들이 직접 겪고 있는 현실이죠.

지도자 그룹에 있으면서 세상을 혼란스럽게 하고 시비를 가중시켜서 사회를 시끄럽게 만든다는 것은 어떤 측면으로 보아도 반사회적인 악행일 수 밖에 없으며, 국민의 힘을 분산시키고,국가사회의 발전을 해치는 행위라고 볼 수 밖에 없읍니다.

지도자 그룹에 있는 분들은 항상 자신은 일개 개인이 아니라 국가적인 公人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말조심 몸조심을 해야 되겠지요.

 

 

도의 측면에서 시비를 따지고 분별하며 번지르한 말장난은 일체 허황된 것으로서 도수행상 해로운 것이므로 완전히 제거해야 할 더러운 오물로 취급하고 있읍니다.

노자는 여기서 辯(시비분별하는 말)을 버리라고 충고하고 있죠.

 

지도자가 관념적인 지식과 분별적인 논쟁을 없애면 그 영향이 자연히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어 전체사회가 무위적인 삶을 살게 되므로 사람들은 다툼이 없고 바라고자하는 욕망이 사라지는 것이죠.

어떤 법적인 규제가 없으니 자유롭고, 자발적인 삶으로 인해 평온한 삶이 되겠죠.

다툼이 없으니 서로간 시비가 없고, 더 많이 배워서 저 잘났다는 사람이 없으니, 지식에 대한 욕구도 없으며, 저절로 사사로운 개인성이 없으니 따지고 시비하는 일도 없겠죠.

자연이 주는 삶을 인간으로서 그대로 손상없이 사는 것이죠.

 

(絶聖棄智 民利百倍);

(유가적)성스러움을 끊어버리고 (인의)지혜를 버리면 백성들이 백배나 이롭게된다.

이부분은 다소간 노자 도덕경 내용으로써는 뭔가 이상한 감이 들죠.

백서본과 왕필본의 내용인데, 곽점 초간본이 발굴되기 전에는 그런대로 학자들이 의미를 만들어 주석했읍니다만, 곽점본의 내용이 발표된 뒤에, 이내용이 노자 원래 내용이 아니고,백서본 시대부터 유가를 비판하기 위하여 개작한 것이라는 사실이 판명되었읍니다.

그래서 이번 이 19장의 해석을 일부 곽점본의 구절을 대체해서 해석을 한 것입니다.

 

먼저 자를 보면 원래 노자 도덕경에서 이 聖자가 거의 30여회에 걸쳐 나오는 아주 귀하게 여기는 단어입니다.

聖人은 가장 이상적인 인간으로 표현되는 단어인데, 이19장에서는 오히려 "聖을 끊으라"라고 표현했읍니다.

 

전문학자들의 말로는 대략 백서본이 전국시대 말기에서 한나라 초기에 성립된 것으로써, 이시기에는 제자백가 각파벌들간에 상호견제와 비판을 일삼던 시기라고 합니다.

따라서 유가(공,맹자)와 도가 사이에 상호비판이 왕성하던 시대에 도가계통의 학자들이 유가의 聖人君子와 공자의 仁義 사상을 비판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도덕경의 이구절을 개작한 것이라는 것이죠.

그 반유가적인 비판의 분위기가 위의 "聖을 끊고, 智(지혜)를 버리라"는 구절과 함께 뒤에 나오는, "仁을 끊고 義를 버려라"라는 구절로 나타난 것입니다.

 

여기서 도가학자들이 보는 유가의 성인은 학문을 많이하여 개념적인 人依的 철학을 이야기하는 공자 맹자의 仁義사상을 중심으로 하는 유가 철학자들을 지칭하는 것이죠.

말하자면 유학의 知性的인 聖人들의 철학사상을 비판하는 말 같읍니다.

도가학파쪽에서 볼 때는 유가적인 聖人철학은 자연 그대로의 무위적인 길이 아니라,

에고적 인간사회 위주의 관념적으로 조작된 허황한 개념일 뿐이라고 규정하는 것이죠.

이것은 노자가 주장하는 오직 전체가 하나인 일원적인 절대본체와 무위자연적인 도의 길에 어긋나는 것이며,

단순히 이원화 된 개인성과 개인성의 인간들 관계에 있어서의 유가적인 仁義 철학은 비자연적이고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개념이라는 주장을 내세운 것입니다.

도가의 입장에서는 오직 전체가 하나, 그자체가 일원적이고 자연 무위적인 사랑이지,

에고적 인간들의 관계에서 仁義라는 개념을 만들어 내어,

그런 국가지배책략의 기본철학이론을 내세워서 그것을 가지고 권력층에 빌붙어서 출세하려는 성인군자라는 족속들은 모두 정치 부로커나 출세지향형 사이비 학자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유가적인 성인의 가르침을 끊으라"라고 한 말이 바로 백서본,왕필본에서 "絶聖棄智"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지혜)도 끊으라고 말하고 있죠.

자는 지금은 깨달음,지혜라는 의미가 있지만, 원래 곽점본에는 알知자나 지혜智자를 구분하지 않고 알知자 의미로도 같이 사용한 것 같읍니다.

그런데 이 백서본과 왕필본 문장에서는 유가학파의 仁義사상을 지혜"智"자로 표현한 것이죠.

즉 人依的인 관념적 지혜를 의미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한마디로 에고적 인간사회가 만든 조작된 관념이라는 것이죠.

도가적인 측면에서는 암시적으로 자연 그대로의 무위적인 것이 아닌,

인의적으로 조작된 지혜(仁義)개념을 버리라는 충고입니다. 

 

絶僞棄慮(絶仁棄義)  民復季子(民復孝慈)

僞;거짓,잘못,속이다.그런척 해 보이다. 慮;생각하다,이리저리 헤아려보다.근심하다.어지럽게하다. 仁;어짐,인자함.義; 옳다,바르다. 復; 회복하다,되돌아오다. 季;막내,끝.孝;효도,慈;사랑

 

絶僞棄慮 民復季子; 거짓을 끊고 잔꾀를 버리면 백성들은 어린아이같은 순진함을 회복된다.

는 거짓, 허위,쇼맨쉽을 말하는 것이죠. 거짓을 끊어라.

여기서 거짓이라는 것은 통상적으로 말하는 허위,거짓말, 그런척 하는 것,이라는 의미도 포함되지만, 중요한 것은 이원적인 개념과 의도적인 행위를 말하기도 합니다.

절대본체의 일원적인 상태, 전체가 하나라는 것이외에,

대상적이거나 현상으로 나타난 다거나 자기가 무엇인가를 한다는 에고의식을 전부 허위,즉 僞라고 표현한 것이죠. 단순히 통념적인 "거짓"이나 "허위적인 것"뿐 만 아니라, 자연 무위적이 아닌 것, 의도적이고 조작적이며,인의적 행위와 생각들을 전부 "僞"라고 의미한 것입니다.

여기서는 거짓말과 허위의식이라는 뜻으로 해석하면 되겠읍니다.

 

는 생각하다,이리저리 헤아리고 따져본다, 요모조모로 재본다. 즉 머리를 굴려서 꾀를 쓴다는 의미라고 볼 수가 있읍니다.

棄慮는 두뇌를 굴려서 잔꾀를 쓰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자연스럽게 있는 그대로 행하라는 말씀이지요.

 

는 막내,끝을 의미하므로,

季子는 막내아들이라는 뜻이며, 막내아들은 어리고 순진하다는 의미 같읍니다.

그래서 民復季子란 백성들이 순진무구한 어린아이로 되돌아 간다는 말씀이죠.

 

지도자가 백성들에게 겉으로만 잘 보이려고 쇼맨쉽이나 거짓말을 일체 안하면

백성들은 마치 막내 어린아이처럼 순진무구해진다는 말씀입니다.

지도자가 솔선수범해서 진실하고 조작없는 무위적인 행으로 다스리라는 말슴이죠.

 

(絶仁棄義 民復孝慈);

어짐을 끊고 의로움를 버리면, 사람들이 효성과 사랑이 회복된다.

이것은 백서본과 왕필본의 개작된 내용입니다.

이것도 유가적인 공자의 仁義사상을 직접적으로 비판한 문장입니다.

도가적 입장에서 보면 공자가 제창한 인간관계의 仁(어짐)사상과 義(옳음)철학은

人依的이고 조작적인 관념철학이라 이겁니다.

道家에서는 자연 그대로 인의적인 조작없이 그대로 있으면 저절로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효성이 나타나게 되고,가족간에 사랑이 전개되는데, 왜 억지로 사람들에게 그런 관념을 주입시키냐 이것이죠.

인의적인 강제성으로 線을 그어서 묶어 놓으면 仁義와 반대되는 非仁義도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또 非仁義에 의하여 불효 와 증오,사람들간에 갈등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仁義라는 관념마저 끊어 버리면, 자연에 의해서 저절로 무위적인 가족사회 질서가 이루어져 자연스런 효성과 가족간의 사랑도 저절로 전개되게끔 된다는 것이죠.

이것은 전체가 오직 하나이며, 그 하나라는 도 자체가 바로 사랑이라는 도가적 개념에서 나온 것입니다.

人依的으로 만든 규제나 개념은 자연에 위배되므로 또 다른 규제개념이 나올수 밖에 없다는 것이죠.

유교사상의 인위적인 규제로써의 孝慈개념을 비판하는 것이죠.

 

絶巧棄利  盜賊無有;

매혹 될 만한 것을 끊어 버리고, 이득 될 만한 것을 없애 버리면,

도적이 있을리가 없다

巧;예쁘다,아름답다,솜씨있다,꾀가 있다, 盜賊; 도적.

巧는 예쁜 것, 아름다운 것, 매혹되는 것 등을 말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소요욕망을 일으킬 정도로 아름답게나 매력적인 것을 나타나 보이지 않게 하라는 것이죠.

또한 사람들에게 소유욕심을 일으키게 하는 귀한 물건이나 재화를 아예 없애라는 것이죠.

그렇게 사람들의 마음을 유혹하여 미혹되게 하는 것이나 이익을 얻을 욕망을 일으키는 요인들을 없애면 나라 안에서 백성들 중에 도적이 나올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의 욕망을 일으킬 수 있는 근원적인 요인을 아예 없애라는 것이지요.

 

현대 물질적 자본주의 사회는 개인들의 욕망과 물질적인 행복추구를 사회전체의 기본목표자체로 가장 중요하게 여기죠.

현대사회구조는 개인의 욕구를 사회의 기본 동인(動因)으로 하여 시장경제가 형성되고, 시장과 고객간의 자본유통이 사회경제를 유지하고 있어서, 개인의 욕망이 바로 사회구조가 움직이는 원동력 그자체라고 볼 수가 있읍니다.

따라서 노자 도인 시대의 관점에서 보자면, 현대를 살고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욕망에 물든 도둑에 가깝다고 볼 수가 있읍니다.

자본주의의 근간이 되는 증권시장은 바로  공개된 자본주의 도박장 그자체이죠.

모든 것이 사람을 홀리게 하고, 유혹하고, 이득을 얻기 위한 씨스템인 것입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는 불쌍한 백성들은 모두가 오직 재물과 돈을 위해서만 두눈에 독기를 품고서 자기 혼과 몸은 돌볼 틈새도 없이 그것들만 추구하느라고 온 정력을 거기에 다 바쳐서 일하죠.

그렇지 않으면 자기의 생존을 안전하게 보장할 수 없어 불안한 삶을 살아가야 되므로 어떻게 해서든지 돈만을 �으려고 동분서주 뛰어 다녀야만 합니다.

그래서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의 백성들을 노자 도덕경 식으로 풀이해 보자면,

見巧抱利 盜賊不無(매혹적인 것만 보이고, 자기이득만 취하려는 세상인데, 도둑놈이 없을 수가 없지!(누구나 도둑놈이 될 수 밖에 없소이다)-로자 왈) 라고 逆으로 표현되는 시대가 되겠네요.ㅎ-

 

此三者 以爲文(辯)不足;

이 세가지의 말 내용만 가지고 수행하기에는 (실천하기에)부족하오.  

此;이, 爲; 하다,지어내다.

위의 세가지 충고사항도 단순히 말로 꾸며진 분별의식이므로 실제적으로는

수행하는 데에는 말내용만 가지고는 불충분하다는 말씀입니다. 

 

故令(之)有所屬  見素抱樸  少私寡欲;

그러므로 이말을 따르는데는 함께 주의를 기울여야 할 기본자세가 있으니,

내면의 밑바탕을 지켜보며, 꾸밈없이 순박한 마음을 품고 있으므로써,

사사로운 나(에고)가 작아지고, 욕망은 줄어드는 것이오.

  

故;그러므로, 令; 하여금,가령,이를테면,하게하다,명령하다.법령

所;바,것,곳,屬;무리,동아리,거느리다.권하다.

見;보다,나타내다, 素;본디,바탕,성질,처음.抱;안다,품다,되돌아보다.둘러싸다.

樸; 순박하다,질박하다.꾸밈이없다.통나무,바탕,私;사사로움,개인 寡;적다,작다.

欲; 바라다. 하고자하다.욕심

令(之)有所屬은 - 이 세마디 말을 따르는데는 함께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기본자세)이 있으니-.

之는 왕필본에서는 생략이 되었는데, 백서본이나 곽점본에는 之가 있읍니다.

之는 위의 세가지 충고를 가리키는 대명사인 "이것"또는 "이 세마디 말"을 의미합니다.

令은 지키다, 따르다, 라는 뜻이므로,

令之는 -이 세마디 말을 따르는데 있었서- 라고 번역을 할 수 있죠.

屬은 무리,동아리,잇다, 연속되다.주의를 기울이다.등등의 뜻이 있으므로,

所屬은 함께 계속 주의를 기울이는 것(所)으로 해석 되는데,

세마디 말을 실천하면서 동시에 계속 주의를 유지하고 있어야 할 기본 마음 자세를 말합니다.

그 기본자세가 바로  아래 문장에 있는 것으로,

-내면 본바탕을 지켜보면서 꾸밈없는 순박한 마음을 품고 있으면-,

이라는 기본자세를 말하죠.

그 결과는-

"사사로운 개인적인 에고 나가 적어져서, 욕망이 줄어든다"라고 결론적인 효과를 말씀하고 있읍니다.

대부분의 해석서와 주석서들이 이 부분을 엉뚱하게 잘못 해석하고 있는 것 같읍니다.

예를 들어보면-백성들에게 명령하여 소속되게 한다- 대부분 이런 식으로 오역들을 한 것 같읍니다.

 

곽점본은 백서본과 왕필본에서 빠진 或자가 둘씩이나 삽입되어 있는데,

(或)令之(或)呼屬; 혹시  이세마디를 따르는데 있어서, 가령(或), 함께 지켜야 할 것에 대하여 이야기해 본다면,-

대략 이러한 의미로 번역이 되는데,

이 곽점본에서는 마치 위의 세마디 충고를 실행하는데 어려움이 있어서 잘 수행이 안된다면, 혹시 참고적으로 항상 병행하여 유지 할 수 있는 기본자세라고나 할까, 이러 이러한 기본수행자세를 항상 유지해 보아라, 하는 식으로 조심스럽게 참고사항으로 알려 준 것이죠.

마치 가정법 비슷하게 표현해서 아주 조심스럽게 권장하는 말 같읍니다.

 

이것은 곽점본의 원저자인 노자자신은 구도자가 내면을 지켜 보고, 에고가 없다는 것은 아주 당연하게 여기는 기본 필수자세라고 여기지만, 

或자를 붙혀서 말하는 이유는 혹시 아직 기본적인 수행자세조차 안되어 있고,모르고 있다면, 다시 한번 일러준다는 식으로 아량을 베푸는 노파심에서 말하는 것 같읍니다.

 

그런데 백서본의 개작자가 或자를 다 빼버린 것을 추측해 보면,

백서본 개작자는 곽점본 원 노자와 같이 완전히 도가 무르익은 도인이라기 보다는 노자의 말씀을 신주같이 여기며 수행하는 구도자 입장이므로 아예 내면을 지켜보면서, 순박한 마음을 품고있는 수행이 기본적인 필수과목이라고 중요시하는 구도자이기 때문에 或자를 아예 빼 버리고, 위의 세마디 충고와 항상 함께 해야 할 기본 수행자세라고 여긴 것 같읍니다.

물론 추측 일 뿐이지만, 곽점본 원노자는 완전히 무르익은 도인인 반면에,

백서본 개작자는 그자신이 수행중인 구도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그것은 백서본의 유가 비판적인 문구를 보아도 알 수가 있는데, 실질적으로 완전히 무르익은 도인은 유가 철학이 어떻하든 이런 저런 상관을 안하죠.

물론 왕필본의 개작자는 거의 백서본의 내용을 그대로 답습한 것에 가깝습니다.

백서본이나 왕필본에서는 或자를 완전 삭제해 버려서,

위의 세마디와 함께 항상 기본적으로 병행하여 유지해야 되는 필수기본자세라고 묘사한 것 같읍니다.

 

見素는 "내면 본바탕을 지켜본다"-는 뜻인데, 내면의 마음바탕을 향해서 주시하라,는 말씀이죠.

抱樸은 통나무처럼 있는 그대로 꾸밈없는 순박한 마음을 품는다,는 의미라고 볼 수 있읍니다.

人依性이 없는 자연 그대로 무위적인 삶을 抱樸이라는 단어로 압축한 것 같읍니다.

小私는 사사로운 개인적 에고성인 나가 적어진다는 말씀입니다.

寡欲은 바라는 것이 줄어든다,는 말씀입니다. 욕망이 사라진다는 의미죠.

개인 에고 나가 녹아 없어지면 에고에 딸린 사사로운 욕망도 사라지겠죠.

 

내면 본바탕을 지켜 본다는 것은 마음 넘어에 항상 주의를 준다는 것이죠.

모든 불이원적인 수행이 마음을 넘어선 내면의 바탕에 안정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마음은 항상 생각이 흐르고, 마음이 움직여서 한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하죠.

그러나 마음을 넘어선 내면은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고요한 의식만이 있읍니다.

이 고요한 의식의 마지막 뿌리가 순수한 존재의식입니다.

이 마음 넘어 의식에 안정되어 있으면 저절로 순수하고 고요한 마음이 안정되는데,

이상태가 완전히 안정되어 있으면 "나"라는 에고의식이 점점 녹아서 전체의식에 접근 됩니다.

이 고요한 의식에 안정되면 에고적인 나의식이 희박해지고 전체가 하나로써 여겨지는데,

이상태에 안정되어 있으면 그 空의식조차도 참나가 아니라는 깨달음이 오는 것이죠.

차츰 그동안 잠재해 있는 습기가 모두 사라지면서 에고도 사라지고,

그와 함께 욕망들이 사라지면서 완전히 전체가 하나가 되는 것이죠.

나도 없고 너도 없고, 제3자도 없으며, 세상과 하나가 된 상태가 오면 도의 본체에 가까이 온 것이죠. 이렇게 해서 나라는 존재가 의식과 함께 사라지는 최종 깨달음은 저절로 불시에 찾아 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찾아 오는 것입니다.

수행자가 노력할 수있는 한계는 순수 존재의식까지 밖에 할 수가 없죠.

그 이상 최종 절대상태는 노력은 오히려 저절로 다가오는 깨달음에 장애물이 되는 것이죠.

 

마지막으로  전체적인 내용을 요약해 보면,

관념적인 지식을 끊어 버리고, 분별적인 시비를 없애며,

거짓을 버리고, 얄팍한 잔꾀를 짓지 말고,

욕망을 자극하는 매혹적인 것을 없애고,이익될 만한 요인을 없게한다,

이러한 세마디 글은 모두 의도적인 분별행위로써 실행하는데 부족한 점이 있으므로,이말들을 제대로 따르기 위해서는 항시 기본적인 자세를 함께 주의를 기울여유지해야 되는데,

내면의 본바탕을 지켜보며,꾸밈없는 순박한 마음을 품고 있으므로써,

에고성의 나가  미약해지고,사사로운 욕망이 점점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는 내용의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이 내면을 지켜보고 꾸밈없는 마음으로 살아 가면서,

위의 세가지 충고사항을 지킨다면,

개인적인 나는 사라지면서, 욕망이 적어지고,

따라서 전체가 하나가 되어 도를 완성할 수가 있다는 것이죠.

 

이번에는 가능하면 아주 간단하게 쓰려고 했는데,

또 글이 좀 길어진 것 같읍니다.

끝까지 읽으시느라 수고하셨읍니다. -무한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