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7. 10. 10:26ㆍ성인들 가르침/노자도덕경
[무한진인의 노자도덕경 해설14회]
[原文]
視之不見 名曰夷, 聽之不聞 名曰希, 搏之不得 名曰微
시지불견 명왈이 청지불문 명왈희 박지불득 명왈미
此三者 不可致詰 故混而爲一
차삼자 불가치힐 고혼이위일
其上不修(噭) 其下不昧 繩繩不可名
기상불수 기하불매 승승불가명
復歸於無物 是謂無狀之狀
복귀어무물 시이무상지상
無物之象 是謂惚恍
무물지상 시위홀황
迎之不見其首 隨之不見其後
영지불견기수 수지불견기후
執今之道 以御今之有 能知古始 是謂道紀.
집금지도 이어금지유 능지고시 시위도기
(백서본,왕필본)
[해 석]
(내면을 향해서)
이것을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으니,
평평하여 두드러지게 드러나 보이는 것이 없다고 해서,
이를 일러 "夷(이)"라고 부르는 것이오.
(내면의 귀로)
이것을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으니,
희미해서 뚜렷하지 못하고 어슴푸레하여 들리지 않는다고 해서,
이를 "希(희)'라고 부르는 것이오.
(마음의 촉감인 느낌으로)
이것을 찾으려 해도 체험을 얻을 수가 없으니,
너무나 미세해서 아예 없는 것과 같으므로,
이를 일러 "미(微)"라고 부르는 것이외다.
이세가지는 각각 별도로 이치를 따져 물을 수가 없소.
왜냐하면 모두가 뒤섞여진 일체이기 때문이오.
그 위는 쉴틈없이 움직이는데,
그 아래는 찰나의 변화도 없소.
이것은 연 이어져서 뱅글뱅글 돌아가므로 무엇이라고 이름 붙일수도 없소이다.
(삼라만상이 사라진)아무것도 없음의 본래상태로 되돌아 오면,
이를 일러 모양없음의 모양, 즉 空이라고 하는 것이오.
이 아무것도 없음 상태는
아득하고 멍한 황홀상태라고 묘사할 수가 있겠소이다.
(그래서)
이것을 맞이해도 어디로부터 시작됬는지 알수 없고,
이것을 쫏아 다녀도 어디가 끝인지 찾을 수 없는 것이오.
(따라서)
지금 여기의 현존상태에 확고하게 머물러서,
지금 여기서 "있음"과 일체가 됨으로써,
능히 태초의 시원(始原)을 깨달을 수가 있는 것이외다.
이것이 바로 道로 들어가는 실마리라고 말할 수가 있겠소이다.
[해설]
본 14장은 곽점본에는 없으며, 백서본에서는 58장, 왕필본에서는 14장입니다.
이 장은 구도자들에게는 아주 유용하고 참고될 만한 내용이 많읍니다.
구도자들이 도의 본체를 알기 위하여는 어떤 방향설정과 방법에 대한 실마리를 찾아야 되는데, 이 장에서는 바로 그러한 비의적(秘意的)인 내용을 아무 제한없이
설명해 주고 있읍니다.
개인의식과 절대 본체 사이의 완충지대인 존재의식을 道의 실마리로 설명하면서, 개인의 감각의식과 마음 넘어에 있는 순수의식에 대하여 비교적 자세하게 묘사해서, 과학적인 안목으로 비교적 쉬운 언어로 가르쳐 주고 있읍니다.
이14장의 내용은 제4장과 같은 구도수행에 관련된 내용인데,
4장은 도의 삼매상태를 묘사한 것으로써 혼잣말 형식의 감상문이라면,
이 14장은 그러한 체험을 한 도인이 외부로 나와 제자들에게 체험내용을
공개적으로 가르쳐 주는 형식의 글이라고 볼 수 있읍니다.
도의 본체로 가는 길은 우선 감각적인 의식을 넘어서야 합니다.
감각의식인 마음을 넘어서면 경계와 특성이 사라진 순수존재의식(空)에 이르게 되는데, 이 순수존재의식에 대해서 여러가지 체험적인 설명을 하고 있읍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 존재의식을 지켜보는 수행으로 절대본체에 이르는 방법(실마리)을 알려주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14장은 곽점본에는 빠져 있고, 백서본에는 나와 있는데, 글의 구조나 내용은 왕필본과 거의 같지만, 단어선택은 왕필본에서 많이 교체되어 개작되어 있읍니다.
따라서 왕필본을 주 텍스트로 해석을 하되, 백서본과 아주 다른 문장은 별도로 해석을 해 보았읍니다.
백서본의 단어들이 뜻을 이해하기가 애매한 단어들이 많은데,
왕필본에서는 이러한 애매한 단어들을 명확하게 재선택해서 개작하는 과정에서
문장의미가 조금씩 변화되어 있는 것을 엿 볼수가 있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백서본의 내용을 왕필본에서 아주 다르게 변형된 것도 발견할 수가 있었읍니다.
그러나 道의 체험입장에서는 크게 어긋난다고 여기지 않으며, 이런 기회에 백서본 저작자와 왕필본 개작자의 특성이나 의도의 차이점을 눈치챌 기회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몇가지 문장은 백서본과 왕필본의 내용을 비교 분석해 보기도 했는데,
왕필본의 개작자는 비교적 지성적이고 과학적인 안목이 있는 도인같은 느낌을 받았읍니다.
아주 간단하면서도 내용이 깊은 구도 수행의 핵심적인 가르침이며,
이 글 한장만으로도 훌륭한 구도 수행지침서가 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고 생각합니다.
글이 좀 길어져서 중간에 차한잔 드시면서 두어번 나눠서 읽으시면,
좀 더 가벼운 기분으로 수승한 지혜를 습득하실 수 있을 겁니다.
인내심을 가지고 마지막까지 다 읽으시면 아주 영양가 있는 마음의 양식을
섭취하는 것처럼 마음 깊은 곳에 지혜의 씨앗을 심게 될 것입니다.
이제 해석에 들어가겠읍니다.
視之不見 名曰夷, 聽之不聞 名曰希, 搏之不得 名曰微
시지불견 명왈이 청지불문 명왈희 박지불득 명왈미
夷; 오랑캐, 평탄하다,평평하다,안온하다,멸하다--, 希; 바라다,동경하다,드믈다,성기다,적다.
搏; 두드리다,치다,잡다,찾다. 得; 얻다,손에 넣다,알다.만족하다.
微;작다,정교하다,숨기다,없다.
視之不見 名曰夷;
(내면을 향해)
[이것을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으니,
평평하여 드러나는 것없이 평상(平常-평평하고 늘 있음)하다 하여,
이름을 "夷(이)"라고 부른다.]
之는 視의 목적격 지시 대명사인'이것을' 또는 '저것을'이라고 번역되고,
'이것'이란 특별하게 지적할 수 없는 道의 본체를 향해서 지적한 것인데,
여기서는 맨 마지막 구절에 나오는 '道紀' 즉 道로 들어가는 '실마리' 또는 '단서'를 가리킵니다.
이 道의 실마리는 요즘의 수행체계 용어로는 절대본체의 입구인 "존재의식" 을
말하며, 육체를 자신이라고 여기는 개체적인 에고"나"가 사라지는 지점을 말합니다.
여기서 본다(視)는 말은 육체적인 눈으로 보는 시각작용이 아니라,
"의식의 눈"으로 마음의 내면을 보는 것을 말합니다.
도를 찾고 있는 수행자가 육체적 눈으로 밖의 사물에서 道를 찾는 사람은 없죠.
따라서 視,聽,은 육체적인 눈, 귀의 작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적 감각작용에 대응하는 의식적으로 내면을 보고, 듣는 작용으로
내면을 향해 道의 실마리를 찾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죠.
그런데 왜 視,聽,이라는 육체적 감각기관으로 처음부터 표현했느냐?는 의심이 나오겠죠.
그것은 道의 실마리를 찾아 나가는 것이 의식표면에 나타난 감각기관으로는 알수 없음을 설명해 주기 위한 것입니다.
'보아도 보이지 않는다'는 말은 육체적 눈으로 볼 수 있는 어떤 구체적인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여기서 '夷'는 여러가지 다양한 뜻이 있으나, "평평하다"는 뜻으로 선택해서
평평하여 도두라지게 드러나서 눈에 보이는 뚜렷한 경계가 없고, 항상 있는 것이기 때문에 시작과 끝이 없어서 의식의 눈으로도 분별을 할 수 없는 것이라는 의미가 있읍니다.
즉, 道의 입구인 존재의식은 마음의 심상(心狀)이나 경험으로는 찾을 수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본다는 시각작용은 의식측면에서는 주로 마음의 심상을 본다는 의미이며,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마음의 심상으로도 보는자(근본의식)가 보이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의식의 능동적인 인식적 작용을 대표해서 시각작용으로 상징한 것 같읍니다.
聽之不聞 名曰希;
(내면의 귀로)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으니,
뚜렷하지 못하여 어슴푸레하고 희미하다는 의미로,
이를 "希(희)'라고 부른다.]
이 듣는다(聽)는 말도 내면의 소리를 듣고자 하지만 들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希'라는 글의 뜻이 여러가지 있으나, 소리가 있는 듯 없는 듯하여 헷갈리는 분위기의 어슴푸레하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됩니다.
이문장도 마찬가지로 의식의 듣는 작용을 의미하며, 내면의 소리를 듣는다는 의미도 있지만, 여기서는 의식의 수동적인 인식적 측면을 상징하여 듣는다로 표현했읍니다.
搏之不得 名曰微;
(마음의 촉감인 느낌으로)
[이것을 찾으려 해도(체험하려고 해도) 얻을 수가 없으니,
너무나 미세하여 없는 것과 같으므로,
이를 일러 "미(微)"라고 부른다.]
즉,마음의 촉감인 느낌으로 아무리 찾으려해도 얻을 수가 없기 때문에,
아예 없는 것같과 같으므로 이를 "微"라고 부른다는 말씀입니다.
감각작용으로 찾는다는 것은 어떤 의식상의 체험을 하고자 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주석서와 번역서들은
이 '搏之不得' 를 '촉각으로 만지려해도 만져 질 수가 없다'라고 해석과 주석들을 해놓고 있읍니다.
이것은 위의 두문장인 視와 聽,에 연결해서 搏을 '만지다,접촉하다'로 해석했기 때문인데, 그렇다면 그 술어가 不得(얻지 못한다)이 아니라, 不觸(접촉하지 못한다)이나 不接(만져지지 않는다)이 되어야 의미가 제대로 연결 되겠지요,
그리고 이것은 의식적 직접체험 또는 마음의 내면을 찾는다는 작용으로써,
내면을 본다(視), 내면의 소리를 듣는다(聽),라는 말은 통용될 수 있었도,
내면의 촉감이나 내면을 만진다,라는 말은 의식적인 촉감인 느낌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마음의 느낌인 감각작용을 이용해서는 道의 실마리를 찾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봄이라는 것은 보는자와 보이는 대상으로 둘로 나누어집니다.
들음이란것도 듣는자와 들리는 대상의 두개가 있어야 되겠지요.
"나는 모니터를 본다"했을 때에 "나"는 '보는자'인 주체이고, "모니터"는 '보이는 대상'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보는 자 자체가 되죠.
그런데 위의 본문에서 볼려고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라는 것은 그 볼려고 하는 것이 '보여지는 대상'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알려주려는 의도가 있읍니다.
그 '보이지 않는 것'이란 바로 "보는 자" 그 자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눈은 모든 것을 볼수가 있지만 "눈"자신은 스스로 볼수가 없읍니다.
따라서 여기서 "본다"는 것은 의식의 전체적인 작용을 말하며,
모든 현상세계는 대상으로써 의식에 나타나지만, "의식자체"의 보는자는
볼 수가 없는 것이죠.
보는자는 육체를 가진 한개인의 사람이 아니고, 전체의식 중에서 순수한 (존재)
의식이 보는 것입니다.
현상세계를 일차적으로 보는 자는 바로 순수한 의식인 존재의식이고,
그 순수존재의식을 보는 자는 절대본체가 그 최종 주시자입니다.
따라서 모든 감각작용에서 아는 자는 최종적인 절대 본체가 아는 것입니다.
그 절대본체가 여기서 말하는 道이며, 참나이며, 진아, 자기 본래성품입니다.
불교 유식학에서 말하는 제9식인 여래식이 바로 절대진아이며,
노자 도덕경에서는 道의 本體라고 말합니다.
이14장에서 道紀(도의 실마리)라고 부르는 것은 제8아뢰아 저장식의 마지막 단계를 말하며,이것이 바로 순수존재의식상태를 말합니다.
소위 空의 상태라고 볼 수가 있읍니다.
動的인 의식, 즉 의식의 움직임이 있는 현상적인 의식은 靜的인 근본의식을 알수가 없읍니다.
동적인 의식을 아는 것은 정적인 기본의식입니다.
감각기관에 의해서 변조되고 분해된 動的인 파동의식은 순수한 기본의식자체가 변화 된 것이지만, 이 動的의식은 靜的의식인 존재의식자체를 알 수가 없는 것이죠.
어떤 분은 이부분을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 "들리지 않는 것을 듣는다" 이런 식으로 해석을 했는데, 이것은 너무 오바액션된 해석입니다.
이런 말은 지금부터 천여년전의 저- 중국 선불교 선승들의 소위 공안이나 화두에서는 찾아 볼 수가 있는 말이지만, 여기 이 문장에서는 그런 일상언어의 의미를 초월한 "格外의 언어"로써 사용한 것은 절대 아닙니다.
이문장들은 의식감각으로는 감지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려주려고 맨처음 문장으로 감각작용을 비유해서 도입한 것일 뿐입니다.
여기서 백서본과 왕필본을 간단하게 비교해 보겠읍니다.
백서본; 視之而不見 名之曰微 ;
이것을 보려면 보이지 않는데, 이름하여 "微"라한다.
왕필본; 視之不見 名曰夷; 이것을 보면 보이지 않는데, 이름하여 "夷"라한다.
왕필본은 보이지 않는 것을 夷(평평하여 드러나지 않는 것)라고 했는데,
백서본은 보이지 않는 것을 微(너무 미세해서 없는 것처럼 느끼는 것)이라고 단어가 바꾸어졌읍니다만, 이것은 육체외부 감각기관의 작용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같은 의식적 측면으로 표현한 것이기 때문에 내용상 크게 달라질 것이 없읍니다.
백서본: 珉之而不得 名之曰夷; 의식적 접촉(체험)이 얻어지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夷라고 한다.
珉; 어루만지다. 본뜨다.닦다,(물을)훔치다.
왕필본: 搏之不得 名曰微 ; 찾으려해도 얻을 수 없는 것을 ,
이름하여 微라고 한다.
왕필본에서는 珉자가 이해하기 애매해서 아예 후대에 搏자로 고쳐진 것 같읍니다.
그러나 珉자의 '어루만지다'는 육체감각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의식적인 촉감인 느낌의 체험이라고 이해하면 쉽게 문장내용이 이해가 됩니다.
夷와 微가 바꾸어진 것은 같은 의식적 작용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므로 양쪽이 바꾸어진다고 해도 내용상으로 크게 달라지지는 않읍니다.
그러나 視聽珉을 육체적 감각기관으로 해석을 한다면 좀 이해하기가 애매해지는
경향이 있게 됩니다.
此三者 不可致詰 故混而爲一
차삼자 불가치힐 고혼이위일
此;이,이에. 致;이르다,다하다,보내다, 詰; 묻다,따지다. 混; 섞다,섞이다,합하다.
此三者 ;이 세가지는 (의식적으로 보는 것,듣는 것,체험하는 것)
不可致詰 ;이치를 따져 물을 수가 없다.
故混而爲一;왜냐하면 모두가 뒤섞여진 하나(일체)이기 때문이다.
이세가지(夷,希,微)는 "하나"를 다른 측면으로 각각 표현한 것일 뿐이지
같은 것이기 때문에, 세개를 각각 하나씩 따로 따로 띄어서 따지고 말할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순수존재의식으로부터 모든 삼라만상과 마음 육체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세상만물은 시간과 공간 안에서 육체의 감각의식에 의해서 표현되는 것인데. 그 기본바탕은 바로 순수존재의식인 空의식입니다.
이 순수존재의식인 空의식을 여기서는 "하나"로 표현 했읍니다.
[이세가지는 이치를 따져 물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모두가 뒤섞여진 일체이기 때문이다.]
백서본; 三者, 不可至計; 세가지는, 계산으로는 따질 수가 없다.
왕필본과 의미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읍니다.
其上不噭 其下不昧 繩繩不可名
기상불교 기하불매 승승불가명
噭;(빛이) 희다, 밝다. 昧;어둡다,찟다,탐하다.무릅쓰다.
繩; 노끈, 잊다. 繩繩;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다.
왕필본에서는
其上不噭 ;직역해 보면-그 위는 밝지 않고-이지만,
의미적으로 해석하면 -그것의 위에 있는 마음은 무지(無知)이며,
其下不昧 ;직역하면-그 밑은 어둡지 않다,-이지만,
의미적으로 해석하면 -그것이 밑에 있는 본체는 진지(眞知)이다.-
繩繩不可名;연 이어져서 뱅글뱅글 돌아가므로 무엇이라고 이름을 붙일 수가 없다.
[ 그 위는 밝지 않고,
그 아래는 어둡지 않다,
연 이어져서 뱅글뱅글 돌아가므로 무엇이라고 이름 붙일수가 없다]
이 문장은 마음을 넘어선 다음에 존재의식으로 들어간 상태를 묘사한 것입니다.
감각적인 마음 측면에서 내면으로 깊히 내려가면, 마음을 넘어선 존재의식으로 들어가는데, 존재의식에 들어가기 이전의 개체적인 마음상태를 그 위(上)이라고 표현 했읍니다.
존재의식 이전의 상태인 개체의식이 無知상태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밝지 않다" 고 한 것이죠.
즉, "전체적으로 깨어있음"이 아니여서 도의 측면에서 밝지가 않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통상 깨달은 사람들이 중생들의 무지한 상태를 지적하듯이,
"밝지 않다"라는 말은 무지(無知)해서 깨어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 다음에 " 그 아래 있다고 해서 어둡지 않다"라고 했는데,
"그 아래"란 바로 의식의 바탕인 절대본체를 말합니다.
이 절대본체는 전체가 하나로써 마치 태양처럼 온통 절대자각의 빛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읍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인 일체가 됨으로써, 밝다 어둡다,하는 이원적인 인식을 넘어선 것이죠. 그자체가 빛이기 때문에 빛자체가 밝음을 느낄 수가 없는 것이고,
어둡다 하자니, 그자체가 빛이기 때문에 어둠도 없읍니다.
그런데 그 위에 있는 마음은 무지(無知)로서 밝지 않고,
그 아래는 진지(眞知)로써 어둡지 않다고 한다면,
그 중간에 있는 끼어있는 것이 바로 여기서 말하는 도의 실마리인 "존재의식"을 묘사한 것이죠.
이 중간에 있는 존재의식은 밝지도 않고 어둡지도 않은 데 , 이것이 도의 실마리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개인의식인 無知상태와 절대본체인 眞知 사이에 마치 강을 건느는 교량 혹은 중간 매듭과 같은 완충지역이 바로 이 <존재의식상태>인 것입니다.
따라서 존재의식 그자체는 無知이긴 하지만 절대본체의 입구이고,
절대본체 쪽에서 본다면 개인의식과 세상을 만들어 내는 어두운 원천적인 환상(마하마야)라고 볼 수 있읍니다.
절대본체는 아니지만 전체 삼라만상이 나오는 근원의식이기도 합니다.
중간에 있는 존재의식은 개인의식같은 無知도 아니고,
절대본체처럼 밝은 깨달음(眞知)도 아닙니다.
그런데 개인의식에서 존재의식쪽을 볼때는 空의식이기 때문에 마치 절대본체처럼 여기고, 절대본체 쪽에서 본 존재의식은 의식파동 그자체가 완전히 한점에 안정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무지가 나온 무지의 근원상태인 것입니다.
존재의식을 지켜보는 입장으로 넘어와서 절대본체입장에 확고하게 안정 된다면 존재의식이고,개인의식이라는 구분이 없이 전체가 일체로써 모두가 절대본체인 그하나로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은 "지금 여기"에서 어디로 넘어가고 말고가 어디 있겠읍니까?
우리들 모두는 항상 절대 본체의 道안에 있는 것입니다. 누구나 할 것 없이- !
"연 이어서 뱅글뱅글 돌아가므로 무엇이라 이름 부를 수가 없다"
繩자는 새끼줄의 꼬여서 엮어진 모습을 표현한 단어인데,
繩繩은 바로 새끼줄처럼 뱅글뱅글 돌아가면서 꼬여서 연 이어진 모습을 묘사한 것입니다.
이것은 마음을 넘어서 존재의식으로 들어가면, 그 존재의식이 파동성을 가지고
빙글빙글 돌아가며 회전반복운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묘사한 말입니다.
어떤 체험자는 빙글빙글 돌아가는 회전성의 원운동형태로 체험하지 않고,
쿵닥-쿵닥 하는 피스톤형의 반복진동을 체험하는 사람도 있읍니다.
또 어떤 사람은 몸전체나 일부분이 자연적으로 진동하는 경험도 하는 것이죠.
그러나 몸자체가 진동하는 것은 아직 육체를 자신으로 여기는 육체 동일성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아직도 육체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에 육체부위가 직접 진동에 이끌려서 흔들린다고 볼 수가 있읍니다.
어떤 사람은 내면에서 氣의 흐름을 느낌으로 그 진동과 함게 조용히 체험하기도 합니다.
이런 체험은 존재의식의 초기상태에서 체험되는 것인데, 주관적이기 때문에
누구나 그런 체험을 똑같이 한다고 볼 수는 없읍니다.
대부분의 도인들은 이러한 구체적으로 경험상의 묘사를 별로 표현하지 않는데,
노자 도덕경에는 세밀하게 묘사가 되어 있네요.
의식이라는 것이 파동성이라는 사실은 알아 둘 필요가 있읍니다.
의식은 파동성 에너지인 생기(生氣) 또는 氣라고 하는 에너지와
앎의 기능이 있는데, 앎(주시)은 의식 중심에 있는 靜的인 측면이고,
氣는 의식의 動的인 움직임 에너지 양상을 말합니다.
앎(주시)은 항상 의식의 중심에 머물러서 주변에서 돌아가는 動的의식(氣)의 움직임을 주시하는 것입니다,
氣는 의식 중심의 바캍테두리 주변에서의 회전움직임 에너지를 말하는 것이죠.
이렇게 원운동으로 일정하게 반복회전하는 존재의식의 움직이지 않는 중심 속으로 합일되면,
전체가 空의식으로 무한하게 펼쳐지므로 어떤 말도 불필요하게 됩니다.
이상태에 완벽하게 안정되면 생각이나 말이나 의식의 움직임이 사라지게 됩니다.
여기서 이부분에 대한 백서본의 문장을 잠깐 비교검토해 보겠읍니다.
-백서본-
其上不攸, 其下不忽 尋尋不可名也(기상불유 기하불몰 심심불가명야)
攸; 바, 다스리다, 닦다, 위태하다.아득하게 멀다,달리다,빠르다. 태연하다
忽;어두운 모양,문득,갑자기,순간,멸하다,잊다,어지럽다.소홀히 하다.
尋;찾다,묻다,이어지다. 尋尋; 이어져 끊어짐이 없다.
其上不攸; -그 위(마음)는 여유가 없다,(쉴새없이 빠르게 변한다)
이 攸자는 참으로 해석하기가 애매한 글자인데, 원래 원문은 (人+收)인데
전문적인 노자주석학자들이 攸자라고 우겨서 그렇게 해석해 온 것 같읍니다.
攸자가 여러가지 뜻이 있는데, 그 중에서 "여유가 있다,유유하다"의 뜻을 선택해서
그 위(마음)는 여유없이 빠르게 흐른다- 즉, 마음이 빠르게 변한다.-이렇게 해석을 했읍니다.
감각기관과 마음 쪽에서 보자면 존재의식의 위(이전)라는 것은 이원화 마음이죠.
마음이 쉴새없이 변한다,-라고 해석을 했읍니다.
어떤 노자연구의 전문학자가 중국의 주석서를 인용하여,
-그 위는 아득하게 멀지 않다-라고 해석을 하셨는데, 그렇게 하면 존재의식과 개체적 마음이 가깝다,라고 해석을 할 수도 있겠읍니다.
其下不忽;
- 그 아래(절대본체)는 찰나의 변화도 없다.
그 아래란 절대본체를 말하는데, 절대본체는 찰나적인 변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아래 절대본체는 순간적인 파동의 변화가 없다는 뜻으로 해석해 보았읍니다.
어떤 노자 전문학자는 중국 주석가의 글을 인용해서- 그아래는 순간적이 아니다-
이렇게 해석을 했는데, 이 경우는 존재의식과 절대본체가 멀리 떨어져 있는 것과 같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가 있겠읍니다.
여기서 위의 두문장을 붙혀 보면,
[그 위의 마음은 쉴 여유가 없는데,
그 아래 절대본체는 찰라적인 변화도 없다.]
백서본은 이렇게 해석 할 수 도 있겠읍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대목인데, 중간의 존재의식을 중심으로 그 위의 이원화 마음은 조금도 쉴틈없이 계속 변동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거친 파동운동을 묘사한 것같읍니다. 또한 그 아래의 바탕은 찰나의 변화가 없다는 것인데 , 이것은 미세한 파동운동조차 없다는 것입니다.
왕필본은 위는 밝지 않고(無知하고), 아래는 어둡지 않다(無知가 없다)-라는 해석과는 앞부분이 다른데, 백서본의 작자가 보는 관점과 왕필본의 개작한 사람의 관점이 서로 다른 것을 알 수가 있읍니다.
백서본에서는 중간의 존재의식에 안주해 있으면, <그 이전의 개체의식적 마음은 쉴틈없이 계속 변하는 파동운동이고, 그 아래 절대본체는 찰나적인 파동운동이 아니다>라고 말하여 수행 중에 체험하는 상태를 그대로 표현한 것 같고,
왕필본에서는 개인의식과 절대본체의 중간 매개체로써의 앎(眞知)의 측면에서 표현한 것 같읍니다.
물론 백서본이 먼저 나오고 이를 본 왕필본의 개작자가 그후에 고친 것이겠지만
두판본의 글이 어느것이 틀리고, 어느것이 맞다고 판단할 수는 없고, 존재의식안에서 사람마다 보는 관점과 체험이 다르기 때문에 달리 표현된 것 같읍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백서본의 이 두문장을 채택해서 해석을 했읍니다.
尋尋不可名也; 직역하면 -끊어짐이 없이 계속 이어져서 그 이름을 붙일 수가 없다-라고 번역이 됩니다.
얼뜬 보면 왕필본과 비슷한데, 왕필본은 繩繩으로 표현하여 이어진다고 되어 있어서 새끼줄처럼 빙글빙글 꼬인 파동회전형태의 의태어로 표현해서 오히려 왕필본이 더욱 세련된 묘사처럼 보입니다.
復歸於無物 是謂無狀之狀
복귀어무물 시위무상지상
復歸; 되돌아오다. 於; 어조사, 狀; 형상,모양
復歸於無物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되돌아 간다.
是謂無狀之狀;이를 일러 모양없는 모양이라고 한다.
[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되돌아 가는데,
이를 일러 모양없음의 모양이라고 한다]
의식 안에서 이 전체현상세계가 나타나는데, 그나타난 현상세계는 5가지 감각기관과 의식을 통해서 다양한 경계와 색깔,특성, 움직임으로 표현됩니다.
그 다양하게 표현되는 것은 5감각기관과 5원소(地,水,火,風,空) 라는 대표적인 물질원소라고하는 개념인데, 이것이 현상계전체를 표현해내는 파동성 의식들입니다.
의식이 물질화로 현상화 되는 과정이란 순수하게 경계가 없던 존재의식이
여러가지 파동성으로 분해되고 간섭하여 감각기관에 나타나는 결과라고 볼 수가 있읍니다.
물론 감각기관 역시도 특정 주파수 스펙트럼대의 파동의식만을 선별해서 의식에 반영을 하지만, 이러한 파동성 정보가 뇌에 전달되고, 그 이전에 저장된 기억에 의해서 의식내에 재생됨으로써 마치 실재처럼 느껴지는 것이죠.
그러나 모두가 실재처럼 여겨지는 만물의 현상계는 실은 단순히 의식의 파동성으로써 마치 빛으로 만들어진 영화의 영상들처럼 그 실재성은 없읍니다.
따라서 위의 노자 본문에서 말하는 無物이란 바로 순수하고 미세한 파동성을 가진 순수존재의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復歸於無物 이란 말은 "불귀칙한 파동의식에서 미세하고 순수한 존재의식으로 되돌아 왔다"는 의미입니다.
모든 만물의 원래의 기본은 이 존재의식(無物)이라는 말씀입니다.
是謂無狀之狀,이란 말은 이 無物상태는 아무런 경계와 형상이 없는 모양이라고 했읍니다.
이것은 마치 하얀 종이 위에 그림이 그려졌는데, 종위위의 그림들이 다 지워져서
다시 백지상태만이 남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경계가 있는 파동성들이 사라진 순수한 존재의식상태는 마치 그림이 지워진 백지상태와 같읍니다.
그래서 모양없는 모양이라고 한 겁니다.
모양이 없으면 그것으로 끝나지 왜 또 모양없는 모양이라고 말을 했을까요?
모양이 없는 존재의식자체도 역시 의식그 자체일 뿐이라는 말입니다.
그림이라는 경계와 색갈만 지워졌을 뿐이지, 모양없는 것도 의식의 범주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존재의식도 파동성은 있지만 아주 미세하고 순수해서 거친 파동의 경계는 나타날수가 없는 것이죠.
그렇지만 존재의식자체도 파동성이 있어서 미세하게나마 항상 쿵닥쿵닥 진동하고 있읍니다.
존재의식도 없다가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시간에 속박되었다고 볼 수 있읍니다.
여기서 이 만물이 나타나는 현상계와 無物,無狀상태를 좀 더 이해하기 위하여
영화를 비유해 보겠읍니다.
영화의 영사기는 돌아가는 필림 뒤에 있는 밝은 램프가 필림에 강한 빛을 투사해서 그 빛줄기가 필림을 통과하고 그 필름의 빛그림자가 영사막에 비추어서 온갖 장면과 사람들의 연기가 빛의 그림으로 스크린에 찬란하게 펼쳐집니다.
이 램프에서 나와서 영사막까지 비추어진 빛줄기가 전체의식이라고 비유해 보고,
보통 우리 현상세계의 삼라만상이 영사막에 비치는 영화의 움직이는 그림이라고 비유하면, 강렬한 빛이 필림에 닿기 전에 비치는 빛은 순수하게 백색광입니다.
일단 빛이 필름을 통과해야 그림이 나타나는데, 바로 필림이 물들지 않은 빛,
즉 필름에 닿기 이전의 램프와 필림사이의 순수한 백색광이 바로 순수한 존재의식으로 비유할 수가 있읍니다.
이 순수한 무색광이 바로 위의 본문에서 말하는 無物 또는 無狀의 狀,과 같은 어디에도 물들지 않은 순수 무색투명한 빛같은 의식이라고 이해하면 되겠읍니다.
無物之象 是謂恍惚
무물지상 시위황홀
象;코키리,꼴,모양. 惚;황홀하다,흐릿하다.확실하게 보이지 않는 모양.
恍; 황홀하다,멍하다,어슴프레하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를 이를 일러 아득하고 멍한 정신상태(황홀)이라한다]
無物之象; 아무것도 없는 상태
是謂恍惚; 이를 일러 아득하고 멍한 정신상태라 한다.
象자는 보통 코끼리象자이지만, 꼴, 모양, 또는 어떤 상태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여기서는 존재의식에 머물러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恍惚이란 의식이 아득하고 멍하다고 표현하고 있지만, 무한한 空의식상태를 말합니다. 의식은 있지만 완전히 백지상태의 의식처럼 어떤 감각작용이나 사고작용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보통 말하는 정신이 흥분상태에 있는 황홀경과는 아주 다르고,
전체가 하나가 되어 삼라만상 경계가 사라진 의식상태를 말합니다.
보통 의식이 있는 삼매상태라고 보면 됩니다.
그러나 이상태는 절대본체는 아닙니다.
절대 본체를 들어가기 직전의 순수존재의식에 안정된 상태를 말합니다.
迎之不見其首 隨之不見其後
영지불견기수 수지불견기후
迎;맞다,영접,맞이하다.~쪽으로,향하여. 隨; 따르다,따라서,발.
이문장도 是之恍惚상태와 같은 상태를 다른 측면으로 묘사한 내용입니다.
迎之不見其首; 그것을 만나서 그것의 처음을 볼수가 없다.
그 존재의식의 전체空상태에 처음 들어서면서 그 시초가 어딘지 모르겠다는 뜻입니다. 분명 들어가기 전에는 쿵덕 쿵덕하고 방아찧는 것같은 맥동이나 빙글빙글 돌아가는 듯한 회전운동을 느꼈는데, 그 안에 들어가고 보니 전혀 위치를 분별하지 못하고 그 맥동의 움직임에 共振되어 처음과 끝이 없어져 버린다는 묘사입니다.
隨之不見其後; 그것을 따라다녀도 그 끝을 볼 수가 없다.
이문장 역시도 앞문장과 합쳐서, 그 미세한 존재의식의 반복 진동 속에서
완전히 합일공진 된 상태를 표현하여 그 공진된 파동 속에서는 시작점과 끝점이 사라져 버렸다는 묘사입니다.
그 진동하는 존재의식 자체가 된 상태를 말하며,
인식상으로는 이의 是謂恍惚이라고 전체가 하나가 되어 무한의식이 된 상태에서 이득하고 멍하지만 깨어있는 상태라고 볼 수가 있읍니다.
자기자신이 그 회전진동하는 의식자체와 하나가 되어 공명(共鳴)하고 있으므로 파동의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것이죠.
이렇게 해서 지금까지 감각의식 넘어에 있으며 절대 본체의 입구인 존재의식상태에 대하여 경험적인 측면에서 비교적 상세하게 묘사한 설명을 들었읍니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서는 꼭 위와 같은 경험하고는 전혀 틀릴 수도 있고,
아무런 경험도 없을 수도 있으므로 道로 들어가는 입구(실마리)의 표준적인 해설이라고 여기실 필요는 없읍니다.
위의 경우는 한 예를 들어 준 것 뿐입니다.
執古之道 以御今之有 能知古始 是謂道紀.
집고지도 이어금지유 능지고시 시위도기
執; 잡다,가지다,맡아 다스리다.처리하다,사귀다. 御;거느리다.길들이다. 합일하다,영합하다.막다,다루다,마부.
紀;벼리(그물코의 굵은 줄, 일아나 글의 뼈대가 되는 줄거리)밑바탕,실마리,단서,계통을 세우다.
이14장의 핵심이 이 마지막 문장에 숨겨져 있읍니다.
執古之道; 직역하면,- 옛道를 잡는다-라고 해석할 수 있지만
古之道-는 단순히 옛 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太古의 道인 최종적인 <절대본체>를 가리킵니다.
절대본체를 가리키는데 왜 옛 古자를 썼을 까요?
태고적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그대로 있다고 해서 절대본체를 가리켜 수행체계의 집안에서는 간혹 "태고적 일"이라고 은유적으로 표현하여 쓰는 경우도 있읍니다.
그래서 절대 본체를 가리키는데, 여기서 현재상태는 존재의식상태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古之道는 <지금현재상태(존재의식)를 지켜보는 주시자>를 말합니다.
그래서 執古之道는 "주시자상태로 머물러 있어라"라는 말씀입니다.
以御今之有; -지금현재 있음에 합일함으로서,-
御자는 합일하다,합방하다,라는 뜻이 있으므로, 합일하다, 또는 일체가 되다,라는 의미로 쓰면 적절한 해석이 됩니다.
지금 현재의 존재상태, 즉 현존(현존) 속으로 완전히 합일한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현재 있는 그대로 머물러 집중하고 있는다,라는 뜻이죠.
수행 중에서 가장 최상 최고의 수행은 바로 지금현재의 있음에 아무말없이 그대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 지금현재 있는 그대로에 합일됨으로써 >
能知古始; 태초의 시원을 깨칠 수가 있다.
古始는 태고의 始原인 절대본체를 말합니다.
절대본체인 의식의 근원을 깨달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是謂道紀; 이를 일러 도의 실마리라고 한다.
紀란 그물의 작은 벼리줄 또는 엉킨 실타래중에 나온 작은 실마리를 의미하죠.
따라서 道紀란 도의 본체로 들어갈 수 있는 실마리,꼬투리같은 의미입니다.
엉킨 실타래를 풀기 위하여 작은 실가닥의 실마리 하나를 찾아서 그것으로 인해서 뒤엉킨 실타래를 풀 듯이,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고, 경험할 수도 없고, 의식으로 알 수도 없는 절대본체인 도의 실타래를 풀기 위한 작은 실마리가 바로 "지금 현재 있음을 지켜보는 주시행위"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죠.
전체의 번역을 이어서 문장을 만들어 보면,
[절대 본체의 주시자로 머물면서,
지금현재, 있는 그대로와 알체가 됨으로써
능히 태초의 시원을 깨달을 수가 있는 것이다.
이를 일러 도로 들어가는 실마리라고 한다.]
이 내용을 보면 지금의 수행방법이나 2천 삼사백년전의 노자시대의 도는
그 기본 방편내용은 거의 변함이 없는 것 같읍니다.
지금 현재의 현존감에 그대 머물러 있는 것은 동시에 자연적인 주시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구태여 옛道(절대본체의 주시)를 잡고 있으라고 한 것은 왕필본을 수정한 사람이 명확하게 가르쳐 주기 위해서 개작하여 강조한 것 같읍니다.
순수존재의식에 '있는 그대로 머물러 있는 상태'는 바로 전체적인 주시상태로 자연적으로 진행되는데, 그 존재의식상태에 그대로 만족하지 말고 그 넘어의 절대본체를 지향해야 된다는 의미로 강조한 것 같읍니다.
-백서본의 문장을 검토해 보겠읍니다-
백서본; 執今之道 以御今之有 : 지금현재(존재의식)의 도에 머물러서, 지금현재의 있음에 그대로 합일됨으로써-
왕필본; 執古之道 以禦今之有: 절대본체의 주시자로 머물러서, 지금 현재의 있음에 그대로 합일함됨으로써-
백서본에서는 "지금현재의 도를 붙잡고 있으면" 이라고 되어있죠.
요즘 말로 "지금여기"에 현존(現存)상태로 그대로 가만히 있으라는 말입니다.
원래 "존재의식상태"에서는 "지금 현재"에 머물러서 있는 것이 옳바른 말입니다.
즉 현존상태에 머물러 있으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왕필본에서는 執古之道, 즉 옛道를 붙잡고 있으라고 했읍니다.
이 옛道란 주시자 상태이므로, 주시자로서 존재의식에 그대로 있으라고 했읍니다. 존재의식에 안정되어 있는 상태에서는 백서본의 말씀이 옳바릅니다.
왜냐하면 존재의식에 깊숙히 안정되어 있으면 자연적인 주시상태가 되므로 더 이상 다른 주시행위가 될 수가 없읍니다.
그 상태가 주시상태여서, 그대로 가만히 있기만 하면 절대본체에 도래합니다.
그러나 왕필본에서 주시자(告之道)로 머물러 있으라는 말은,
완전히 존재의식에 정착 된 상태가 아니고, 존재의식 초기나 아니면 존재의식과 개인의식사이에서 간혹 왔다리 갔다리하는 불안정한 존재의식상태에 있을 때에
지금현재에 있는 상태를 그대로 주시하라는 말씀입니다.
대부분은 존재의식 초기에 여러가지 유혹적이고 신비적인 경험이 일어나서 존재의식에 깊히 안주하지 못하는 경우가 수행자의 구십프로 이상입니다.
또한 아직 남은 습이 벗어지지 않아 수행이 완숙하지가 못해서 존재의식의 맛은 보았어도 그 속에 고요하게 안주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그런 경우는 "지금현재의 있음(現存)"을 그대로 주시하는 상태(執古之道)를 유지하여 안정된 존재의식상태로 못 박아야 합니다.
일단 존재의식에 깊히 안정되면, 그다음에는 주시상태가 사라져서, 지금현재에 있는 그대로 머물게 되어 있읍니다.
또한 왕필본의 執古之道는 존재의식 상태와는 상관없이 어떤 경우에도 만능으로 항상 통용될 수 있는 수행자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왕필본 개작자와 백서본 저작자 간에 약간의 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이렇게 다르게 쓰여진 것입니다만, 두 판본이 틀리다,맞다, 말할 수는 없고,
경우에 따라서 둘다 적절하게 적용될 수 있다고 판단됩니다.
그러나 이14장의 내용이 주로 존재의식에 대해서 언급한 측면으로만 보아서는 '지금현재 현존상태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라'는 백서본의 執今之道가 왕필본의 執古之道 보다는 더 적절한 표현같읍니다.
따라서 본 해석에서는 이 마지막 부분만은 백서본의 <執今之道 以御今之有>로 원문을 바꾸어서 해석을 했읍니다.
즉<지금 여기의 현존상태에 확고하게 머물러서,지금현재 "있음"과 일체가 됨으로써>라는 내용으로 해석을 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하였읍니다.
이번 14장은 설명 분량이 많아서 다른 해석서나 주석서들의 번역내용을 언급하지 않았읍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번역서들은 글자의 뜻 그대로 번역을 했기 때문에 내면의 속내용을 이해하기가 어렵게 해석해 논 것이 대부분입니다.
대략적으로 어려운 한문문장이 없기 때문에 비슷한 번역들을 했지만,
마지막 執古之道 같은 의미는 글자 그대로 번역을 했을 뿐 자세한 의미들을 파악하지 않은 것 같읍니다.
구도자들에게는 아주 훌륭한 참고자료가 될 수 있겠고,
구도자가 아닌 분들도 道로 들어가는 의식의 구조를 이해하는데 훌륭한 교양이 되는 글이며, 그래서 좀 자세한 설명을 붙히느라고 너무 글이 길어 진 것 같읍니다. 긴 글 읽으시느라고 고생하셨읍니다. 감사합니다. -무한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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